교사가 교사에게

아웃사이더에게 무대를

리틀윙 2014. 9. 23. 07:13

몇 해 전 체육전담을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5학년 아이 가운데 공부는커녕 운동도 못하고 놀 줄도 몰라 대관절 삶에 의욕이 없어 보이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보통의 아이들은 지식교과(도구교과) 시간엔 소극적이다가도 체육시간만 되면 눈이 반짝반짝 하는데, 이 아이의 경우는 무슨 수업시간이든 도무지 의욕을 보이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체육수업 시간에 모두가 열심인 소집단 신체활동에도 동참을 하지 않았습니다. 급우들은 아이의 이러한 성향을 알고서 아예 학급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제쳐놓은 듯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느 날 체육수업시간엔 무엇을 굉장히 열심히 하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때는 학년 초인지라 체육실에 비치된 공들이 지난 겨우내 대부분 바람이 빠져 있기에, 아이들을 모둠활동 시켜놓고 나 혼자서 공에 바람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다가와서 지금 뭐 하시냐고, 나도 한번 해봐도 되냐고?” 물어옵니다. 내심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임무를 맡겨봤습니다.

자원봉사자에게 내 짐을 떠맡기고 모둠활동을 점검하러 한 바퀴 돌고 왔는데, 놀랍게도 그 어설퍼 보이기만 한 아이가 30개가 넘는 농구공과 배구공에 바람을 다 넣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아이에 대해 우리 교사들이 품는 신뢰의 문제는 끈기와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집중력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녀석이 과연 몇 개의 공에 바람을 넣을 것인가 하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공을 혼자 힘으로 진득하게 다 넣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2학년 때부터 이 아이를 봐왔지만 실로 이처럼 진지한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순간, 어떤 깨달음이 일었습니다. 아이가 지금껏 무슨 활동에 소극적이고 나태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원래 이 아이가 그러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이에게 적합한 활동과업을 부여하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오직 학교란 곳에서만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매일 몇 시간씩을 보낸다. 학교를 벗어나서는 우리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필요를 거의 못 느낀다.

 

미국의 교육학자 잭슨(Jackson, P.)의 책 [교실살이, Life in Classrooms]에 나오는 말입니다. 저는 첨에 잭슨의 이 말을 접하면서 몇 가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교사가 돼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매일 그렇게 버텨오는 아이들이 너무 기특한 것과 또 우리가 소시 때 그렇게 버텨왔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신성한 학교를 이렇게 비유하는 것이 불경스럽습니다만, 비판 교육학자들은 흔히 학교를 감옥에 비유하곤 합니다. 아마도 우리 인간이 가장 있고 싶지 않은 공간이죠. 그런데 감옥의 죄수들도 하루 몇 시간씩 옴짝달싹하지 않고 앉아 있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어른도 아닌 쬐끄마한 아이들을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하루 대여섯 시간을 자리에 앉아 있게 하는 것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나마 공부에 소질과 흥미가 있는 아이들은 배우고 때로 익히며학이시습의 즐거움을 얻어 가지만, 학교에 와도 도무지 낙이 없는 아이들을 하루 종일 자리에 공부 시키는 것은 정신고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라는 곳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진배없는 것이죠.

 

아웃사이더들에게 교육의 이름으로 어떤 기회나 역할을 마련해줍시다.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수만 가지 능력 가운데 단 하나를 잘 한다는 의미이련만 우리네 학교에선 학업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아이들을 재단해 버립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스스로를 무능하고 열등한 사람으로 자기최면을 걸어갑니. 그러나, 평소 교사의 눈밖에 벗어나 말썽만을 일삼는 아이들도 야영장에서 장기자랑 시간엔 모두를 깜짝 놀래키는 재능을 발휘하곤 합니다. 학교의 일상생활에선 존재감 없어 보이던 아이들도 자신의 끼를 발휘할 무대를 만들어주면 스타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교는 학생이 저마다 타고난 소질과 개성을 발산하게 하고 또 대중 앞에서 자기 실력을 뽐낼 수 있도록 다양한 무대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위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라는 무대만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음악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한 딴따라 무대, B보이를 지망하는 아이들을 위한 댄스 무대도 만들어주면 좋을 겁니다. 학년말 학교교육과정을 짤 때 학교차원에서나 학년 혹은 학급 차원에서 그런 무대를 많이 배치해줌으로써 학교에 와서 도무지 낙이 없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견뎌나갈 수 있게 하면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덜 미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서 만약 모차르트가 현대의 한국학교에서 공부를 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음악천재라는 것 빼면, 우리가 학교에서 상장 문구 속에 담는 말,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함과는 완전 거리가 먼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자기 할 말을 내뱉는 그의 태도는 사회성 없음으로 생활기록부에 기록될 것이며, 자유분방한 그의 기이한 행동성향은 ADHD로 분류되어 꼰대들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관리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이 창살 없는 감옥을 견뎌나가며 자신의 천재성을 무럭무럭 키워나갈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남다른 감수성을 가졌으되 맹목적 학력 신장엔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삐딱한 아이들은 혹 모차르트와 같이 이 다음에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할 잠재성이 있는 아이로 봐야 합니다. 잠재적 모차르트에게 성적이란 잣대로 스트레스를 가한다면 그 아이의 예술가적 감성이 사춘기 특유의 질풍노도와 결합하여 빗나간 반항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나아가 그 같은 반항심이 불운한 어느 한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약간 과장되게 말하면, 모든 아이에게 똑같이 학업성적만을 강조하는 교육시스템은 잠재적 예술가를 잃는 동시에 잠재적 파괴자를 만들어내는 점에서 이중적인 사회적 손실을 낳는다 하겠습니다.

교육의 본질은 아이사랑이며 교육정책은 만인의 행복을 위해 추구되어야 합니다. 페스탈로치의 교육애와 선량한 교육정책은 그늘진 곳에서 갈 길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위해 베풀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교육의 현실은 정반대로 돌봄이 전혀 필요치 않은 소수의 잘난 아이들을 위한 승자독식의 무대만을 차려놓고선 절대다수의 아이들을 들러리로 세워 바보로 만들어갑니다. 그 중 개성이 강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은 자칫 위험한 반사회적 아웃사이더로 돌변한 위험성을 늘 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인 것입니다. 이들의 억눌린 열정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발산하게 함으로써 프로이드가 말하는 승화를 일궈내는 일, 이게 우리 교사들의 중요한 소임이라 생각합니다. 약간의 배려로 이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면, 이들이 범생이들보다 사회적으로 더 유용한 일꾼으로 성장할 지도 모릅니다.

 

 

2010년 여름 미국 시카고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 동네에선 관()에서 애써 무대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누구나 스스로 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즐기더군요. 무대 위의 주인공들이나 관객들도 사뭇 진지합니다. 간혹 실수가 나오더라도 모두가 박수를 치고 환호하면서 격려해줍니다. 무대를 통해 관객과 공연자, 시민과 학생, 어른과 아이가 모두 하나 되는 공동체 의식을 길러 가는 것입니다. 뒤편에서 짝다리 짚고 서 있는 아이가 사회를 보는데 말을 얼마나 재밌게 하는지 연신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냅니다. 그가 구사하는 어법은 토론(디베이트)대회나 웅변대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거리 먼 것으로 제도권에선 권장되지 않는 어법이지만 달변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이 아이들이 그 신기에 가까운 브레이크 댄스 동작을 익히는 것에 열정을 쏟지 않았다면 혹 이 거리가 아닌 소년원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교사가 교사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론과 실천  (0) 2014.10.04
방문객  (0) 2014.09.30
진보와 보수 : 전교조의 명암  (0) 2014.09.21
교직의 정체성, 교육의 리얼리티  (0) 2014.09.14
교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0) 2014.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