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교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리틀윙 2014. 9. 12. 07:55

이 책의 글들은 제가 짬짬이 제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한 작품으로 묶은 것입니다. 블로그와 연동된 제 페이스북을 통해 글들이 벗들의 벗들에게로 폭넓게 확산되면서 많은 분들에게 읽히게 되는데, 몇몇 분들은 제 글에 대한 비평 또는 소감을 블로그에 남겨주시곤 합니다. 긍정적인 평이 많지만 아쉬움이나 유감을 표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부정적인 평은 대부분 승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제 글이 승진파 교사들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말씀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그런 분들은 승진을 욕망하고 그 실현을 위해 애 쓰시는 분들이겠죠. 저는 그런 분들의 지적이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 터한 뒤틀린 심사를 피력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게 주관적이라면, 반대로 승진을 포기하고 교직생활을 영위하는 교사들이 제 글에 대해 보이는 호응 또한 주관적이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람이 포부를 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는 바람직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런 점들을 객관적으로 짚어보고자 합니다.

 

무릇 모든 시스템 속에는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 동력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동차를 움직이는 핵심은 엔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라도 엔진에 기름이 공급되어야 하고 또 주유된 기름은 점화플러그에 의해 연소작용이 일어나야 바퀴로 동력이 전달되어 구동됩니다. 이 같은 이치에서, 학교라는 기관차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원은 교사집단인데 엔진의 스파크 작용에 해당하는 무엇이 교사들의 마음속에서 일어야 학교교육이 원활히 돌아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동기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동기에는 내발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와 외발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가 있습니다. 내발적 동기란 과업 그 자체에 대한 흥미나 즐거움에 의해 추동되는 것으로서 외적 강제가 아닌 개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동기를 말합니다. 반면, 외발적 동기는 행위자의 바깥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돈이나 점수 따위의 보상이나 강압이나 위협 같은 체벌적 요소가 외발적 동기에 해당합니다.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점에서 내발적 동기는 능동적인 반면, 외발적 동기는 외적 원인에 의해 행위를 취하기에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에 해당하는 영단어는 ‘passive’인데 그 명사형은 passion(열정, 정념)이죠. 여기서 열정수동적이란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passion은 원래 철학적 개념으로서 분노, 탐욕, 욕정 따위의 죄악의 정서에 사로잡힌 상태를 뜻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기독교적 봉건사상이 지배하던 중세유럽사회의 산물로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열정이라는 단어의 뜻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학교에서 교사집단 사이에 팽배해 있는 외발적 동기가 딱 이와 같습니다. 교사는 승진이라는 이름의 외발적 동기에 사로잡히는(passive) 순간 더 이상 선량한 교사이기를 그칩니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온갖 반교육적 작태들의 대부분은 이 승진이라는 외발적 동기에 터해 빗나간 정념(passion)에 사로잡힌 교사들, 왜곡된 피라미드 구조의 상층부에 있는 소수의 승진파들에 의해 빚어집니다.

교사를 움직이는 동기는 내발적 동기가 전부여야 합니다. ‘가르침이라는 교사의 행위(action)액션이란 명사와 조응하는 형용사의 의미처럼 능동적(active)인 것으로서 그 동기는 교육혼이란 낱말로 대변됩니다. 학생을 신명나게 가르칠 때 흥을 느끼고, 그 능동적인 나의 액션에 힘입어 학생이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변화를 보일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이것이 교사입니다. 기실 교사의 존재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과 학생들에게 최선의 가르침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그 열의가 교사 존재론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혹 자본주의사회에서 교사도 결국 돈 벌기 위해 가르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지도 모릅니다. 교사도 노동자인 이상 자기 노동에 대한 대가를 염두에 두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쳇말로 먹고 살기 위해 선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 가르친다는 것은 숨 쉬기 위해 가르친다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말입니다. 나아가 이 물음이 무의미한 결정적인 근거는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와 대충 가르치는 교사나 모두 같은 몫의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열과 성을 다해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교육을 하는 교사에게 그렇지 않은 교사보다 더 많은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게 선생의 존재론이기 때문입니다.

 

 

 

 

페스탈로치의 길을 가고자 고귀한 이상을 품고 교단에 선 젊은 교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뭐던가요? 일천한 교직경험으로 교재연구와 학급경영에 고민을 쏟을 시간도 부족한데, 아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각종 전시용 행사와 교육실적물 양산해내는 데 미력한 자기 역량의 대부분을 소진해야 하는 현실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 아닌가요? 공사판도 아니고 어떻게 신성한 교육의 장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그것도 전문직을 자임하는 지성인들에 의해 빚어지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죠. 그러나 엄격한 위계질서를 근간으로 돌아가는 조직사회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분은 어쩔 수 없이 그 묻지마교육노동시스템 속에 몸을 맡깁니다.

정상적이고 선량한 교사라면 이 언어도단의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최소한 혼란을 느껴야 합니다. 이 분열적인 현실에 적응해가며 수업시간에 아이들 자습시켜 놓고 소모적인 문서작업 해대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치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 많은 교사들은 자기치유의 길보다는 승진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아이들을 소외시켜가며 백해무익한 페이퍼워크를 억지로 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그것을 시키는 입장에 서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의 상식적인 시각으로는 교직사회에서 승진하는 사람이 뭔가 유능하고 또 헌신적인 교사일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사에게 승진은 얼마나 유능한가 혹은 얼마나 아이들에게 헌신적인가가 아닌, 얼마나 잘 버텨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승진 사다리에서 결정적인 것은 근평과 벽지점수입니다. 무능한 교사나 동료로부터 지탄을 받는 교사라도 가학적인 관리자에 잘 적응하고, 산골짜기나 외딴섬에서의 모진 물리적 조건과 심리적 고독을 잘 견디는 사람은 관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분열적인 교직 현실 속에서 혼란을 겪거나 사회적 모순이나 교육모순에 민감한 교사는 이른바 교포(교장 포기)’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저는 승진은 교사가 갈 길이 아니라 믿지만, 그 길을 가는 교사들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승진에 눈 먼 교사치고 인간적으로나 교육적으로 호감이 가는 사람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직사회가 변해가고 있습니다. 승진을 쫓는 분들 가운데 동료교사들로부터 신망을 얻는 분들도 적잖습니다. 그러나 교사 승진과 관련하여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철칙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열정은 결코 무한하지 않아서 한 곳에 정신 팔려 있으면 다른 곳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도 의욕도 없어지는 것이 필연입니다. 교사가 승진을 꿈꾸면서부터 자신의 온 촉각이 교실보다는 교장실, 학교보다는 교육청으로 옮아가게 됩니다. 이 같은 변화는 일종의 외도에 해당합니다. 부모역할의 본질이 자식사랑이듯이, 교사의 본분은 아이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승진을 욕망하는 교사들은 자식대신 자리를 위해 자신의 열정을 쏟으니 이 애정행각외도라 규정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둘째, 승진은 객관적인 점수를 필요로 하는 게임인 탓에 당사자는 가시적인 실적 거양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선행 따위는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교육의 속성상 바람직한 교육실천은 결코 계량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결실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백년지대계라 일컫는 것이죠. 그런데 이 백년지대계의 사업 효과를 단시간에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애쓰다보면 온갖 위선과 허구가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승진에 필요한 대부분의 실적이 이렇게 얻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피해를 입고 동료교사들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게 되며,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이 망가져갑니다.

셋째, 승진은 제로섬게임이기 때문에 나의 행복은 이웃의 불행을 통해 얻어집니다. 소수셋째자리까지 점수에서 서열이 크게 뒤바뀌는 현실에서 학교장의 근평은 절대적입니다. ‘1등 수를 받기 위해 교장·교감을 상대로 한 치열한 충성경쟁에서 이겨내야 하며, 목적 달성을 위해 부적절한 거래가 오가는 것도 다반사입니다. 동료교사의 피눈물을 대가로 자신의 승리를 쟁취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봐왔습니다. 그 극단적인 예로 교실에서 목을 맨 여교사도 있었죠. 이처럼, 승진의 레이스에 뛰어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소모적이고 비인간적인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고서 관리자라는 면류관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잃는 게 너무 많지 않나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은 사랑입니다. 지상에 유배된 천사 미가엘은 엄마 잃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부인을 보고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럼, 교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요? 전문직 종사자인 교사가 아이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가르침을 통해서입니다. 새는 날기 위해 존재하고 교사는 가르치기 위해 존재합니다.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버디 Birdy>의 한 장면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겠습니다. 주인공 버디는 베트남 참전용사로서 고국으로 돌아온 뒤 전쟁의 참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심각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깥출입은 전혀 하지 않고 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새에 관해서만 집착하는 것이 그의 일상의 전부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버디에게 왜 그리 자나 깨나 새타령이냐고 묻습니다. 이에 버디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새는 날 수 있잖아. 날면 그것으로 족해!”

교사가 돼서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교실을 벗어나 아이들 가르치기를 멈추는 것이 교사의 꿈일 수 있을까요? 승진을 꿈꾸는 순간부터 우리는 교사이기를 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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