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통합적 관점 갖기

리틀윙 2014. 2. 21. 17:20

   교사에게 권위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 권위가 자칫 권위주의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에 교사는 자신의 교육실천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권위주의를 피하면서 권위를 지켜야 하는데, 이는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권위적이어야 한다는 뜻으로서 일종의 모순어법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어법은 형식논리상의 모순일 뿐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어떤 묘한 역설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절묘한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합적 관점이 요구됩니다.

모든 사물은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 심오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상 위에 놓인 컵 하나를 봐도 빛이 들어오는 쪽은 밝고 반대쪽은 어두운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 이 같은 이치에 따라 스케치나 채색을 하는데 이러한 기법이 음영법이죠. 통합적 관점(synthetical perspective)이란 이 음영법처럼 사물의 두 측면을 함께 그려내는 사고방식이라 하겠습니다.

 

 

 

 

고대 동양의 음양이론이 통합적 관점에 잘 부합하는 사고체계라 하겠는데, 모든 사물이 지니고 있는 서로 대립되는 두 속성을 서양철학에서는 양극성(兩極性, bi-polarity)’이라 일컫습니다. 이 두 극성은 서로 대립되는 측면이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을 이룹니다. 이를테면, (+)극 또는 (-)극으로만 이루어진 전기나 N극 또는 S극만 있는 자석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빛과 그림자는 고정불변된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역동성을 띱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되며, 먼저 온 자가 나중 되고 나중 온 자가 먼저 되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통합적 관점으로 학생과 교육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놓치고 있었던 의미심장한 역설적 진리를 깨닫게 되고 또 기존의 우리 사고가 얼마나 편협하고 편향된 선입견으로 흘렀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통합적 사고의 교육적 의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해보겠습니다.

 

방금 논했듯이 통합적 사고의 핵심은 사물에 내재해 있는 상호대립적인 두 속성(양극성)을 따로 따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통합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사물의 두 측면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이분법적 사고라 일컫는 것입니다. 불교나 노장사상 같은 고대 동양의 사상체계가 통합적 관점을 지향한다면 이분법적 사고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서양철학에 맞닿아 있다 하겠는데 불행히도 현대인들은 이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 이론과 실천 따위를 각각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각각의 축은 수레의 나란한 두 바퀴처럼 함께 나아갑니다. 이성과 이론이 발달하는 만큼 감성과 실천도 발달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통합적 사고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이분법적 사고의 폐단을 인식하는 것이 주효할 것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사물의 두 속성을 분리할 뿐더러 서로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둘 중 하나만을 취사선택함으로써 서로를 결속시키는 연대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우를 범합니다. 그 결과 두 다리로 서야 할 것이 각각 한 발로 서는 불구화가 진행되며 서로 합해질 때 생기는 상승작용이 차단되는 역기능이 생겨납니.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런 식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면 인성은 발달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상식적으로도 이는 말도 안 되죠현실적으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학교교육이 기형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하는 탓이지 인성교육과 지식교육이 물과 기름처럼 배타적인 속성이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아는 만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바, 인성과 지성은 나란히 나아갑니다. 진정한 인성교육은 올바른 지식교육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교육현실 속에서 지식과 인간됨, 앎과 삶을 따로 생각하다 보니 학생들에게 공부가 재미없으며 심지어 위선적이고 허구적인 관념놀음으로 인식되어 가는 것은 큰 불상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육의 장에서 그릇된 이분법적 사고의 전형으로 가장 널리 그리고 치명적으로 오도되고 있는 인식이 놀이와 학습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피아제가 말하는 형식적 조작기 이전의 아이들은 직관과 감각으로 세상과 접촉하며 삶에 필요한 중요한 지적·정의적 역량을 학습해가기 때문에 놀이는 곧 학습입니다. 내용적으로나 방법적으로도 놀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튼실한 공부를 꾀할 수 없습니다. ‘역할놀이라는 개념이 말해주듯 아이들에게 놀이는 곧 삶이라 하겠습니다. 놀이를 통해 삶의 중요한 기능을 배웁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놀이를 차단하는 것은 공부를 못하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놀이와 공부를 배타적인 속성으로 간주하여 공부에 대한 반대급부로 놀이가 주어지니 아이들에게 공부는 지긋지긋한 무엇으로 학습되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유명한 책 제목이 웅변해주듯, 우리 삶에서 중요한 학습의 대부분은 놀이를 통해 익힌 것들입니다.

 

 

 

 

이는 결코 덧없는 이상주의적 슬로건이 아닙니다. 교직사회 바깥에 계시는 분들은 요즘 아이들은 적게 놀고 이런저런 학원교육을 많이 시키니 우리 어릴 때보다 훨씬 똑똑하지 않냐는 말을 많이 하십니다만 학교교사들은 이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압니다. 올해로 교직경력 27년째 접어드는 저는 해가 갈수록 아이들이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제 첫 발령지는 버스에서 내려 30분이나 걸어 들어가는 오지의 학교였는데 돌이켜보면 그때의 아이들이 제일 똑똑했습니다. 부모님들은 농사짓기에 바쁘고 또 책가방 끈이 짧은 소박한 분들이어서 우짯던동 선상님만 믿고 맡깁니더, 우리 아 잘 봐 주이소라 하셨고 주변에는 작은 교회를 제외하곤 교육적으로 자극이 될 만한 문화시설이 없었지만 그와 더불어 정말로 없어야 할 것도 없었습니다. (학원 관계자분들에겐 미안하지만) 거긴 사설학원이란 게 없었습니다갈 학원이 없으니 교사가 아이들을 남겨둘 수 있었고, 부모님들은 그런 교사의 의지를 두 손 들고 환영했습니다. 그 날의 학습목표를 도달하지 못한 아이들이나 숙제 안 해 온 녀석들은 약간의 나머지 공부를 하고 그 밖의 시간들은 만장같이 넓은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뻥뻥 차고 여름철이면 총각 선생과 같이 냇가에 가서 물놀이를 하고 가재를 잡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의 아이들이 정서적으로는 물론 지적으로도 가장 내실 있는 학습을 해갔습니다. 무엇보다 말귀를 잘 알아들었으며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려 소통하고 공감을 나누는 능력이 지금의 아이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났는데, 이는 시험을 통해서는 측정할 수 없는 중요한 역량이죠. 엄청난 돈을 들이고서도 우리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빚어진 이 모든 역설적 결과는 놀이와 학습을 분리시키고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놀이 기회도 박탈한 채 과도한 학습만 강요한 탓이라 하겠습니다. 학교폭력이니 교단붕괴니 하는 것들은 따지고 보면 천문학적인 사교육비 털어 부어 아이들을 지적·정서적 불구로 만든 필연적인 결과일 것입니다.

놀이와 학습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흥미와 노력 또한 불가분의 관계임에도 우리는 이 둘을 분리하고 또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배타적인 속성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를테면, 공부는 흥미가 없는 것이지만 앞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식이죠. 그러나 옛 성현께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하셨듯이 공부도 흥미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존 듀이의 말을 빌리면, 공부는 흥미에 의한, 흥미를 위한, 흥미의활동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 겨울에 북유럽의 학교들을 탐방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사회의 학생들은 흥미를 갖고 공부를 한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반면 우리 사회의 학생들에게 공부는 고역이죠. 2013PISA(국가간학업성취도평가)에서 우리가 핀란드를 앞질렀다고 하지만 저는 자랑할 게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흥미의 안받침이 없는 노력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흥미 없이 억지로 익힌 학습내용은 머릿속에 오래 남아있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가 흥미를 갖고 읽은 책 내용은 양식(良識)이 되어 우리의 빛나는 자질을 구성합니다. 학창시절에 저는 [사회] 교과에 흥미를 못 느꼈습니다. 흥미가 없다 보니 공부가 싫어지고 성적도 안 나왔습니다. 그러나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접하면서 이게 정말 재미있는 학문이란 걸 알게 되었고 사회학에 흥미를 붙여 관련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어갔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흥미가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만, 학창시절엔 제가 사회에 흥미를 못 붙였던 것은 그 속에 나의 삶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 교과서의 학습내용이 학생의 삶과 동떨어져 있으니 학생들이 흥미를 못 붙이고 또 공부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놀이와 학습, 흥미와 노력, 삶과 공부는 통합되어야 합니다. 선량한 교육제도에 의해 이렇게 구성되어야 하고 또 단위학교나 학급의 선생님들이 이런 식으로 교육과정을 짜서 교육실천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통합적 관점의 핵심은 사물에 내재된 대립적인 두 속성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라 하겠는데, 이 속성들은 고정불변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변화를 겪는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합니다. 빛과 그림자가 각기 따로 존재하지 않듯이 사물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또한 따로 있지 아니합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되듯이, ‘긍정부정은 상호 전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학교에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타의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학생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학생에게도 크고 작은 단점이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까지는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통합적 관점의 가치는 특정 학생의 장점과 단점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을 이루는 것임을 잊지 않는 겁니다. 교사의 눈엔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로 보이는 어떤 모범학생이 또래집단 내에서 카리스마를 넘어 폭압적인 독재자로 돌변하는 경우를 왕왕 봅니다. 이는 리더십이라는 (+)요인이 독재라는 (-)요인으로 전화(轉化) 경우라 하겠습니다.

자녀 교육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학부모들이 담임교사에게 자주 털어 놓는 말이 우리 아이는 내성적이어서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내담자에게 내성적인 것은 축복받은 자질임을 일깨워줍니다. ‘내성적(內省的, introspective, introvert)’이란 말의 본뜻은 말 그대로 안으로(intro-) 향한다(-vert)’ 또는 안을 들여다본다(-spect)’의 의미입니다. 한자어에서도 자가 마음()’()’이 결합되어 성찰(省察)’의 뜻을 품고 있어 영단어의 의미와 일치하고 있죠. 내성적인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성향 탓에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곳에 문제의식을 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때문에 조직생활에서는 적응을 잘 못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이런 사람은 조직발전에 크게 기여할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집단의 건강성은 모두가 YES라 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소수의 노력에 의해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인류 문화사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내성적인 사람일 겁니다.

 

 

 

 

이처럼 통합적 관점으로 학생을 바라보는 교사는 리더십이 강한 반장 아이의 빛나는 자질의 이면에 있는 잠재적 독재성을 간과하지 않으며, 소심한 성격의 아이에게 아직 발현되지 않는 빛나는 장점을 발굴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를 할 것입니다. 여자 같은 남자 아이가 있다면 그는 기집애 같은 사내아이가 아니라 섬세한 자질의 소유자로서 장차 모차르트나 릴케가 될 가능성을 가진 아이로 봐야 합니다. 반대로, 장난이 심한 아이가 있다면 그는 백해무익한 공공의 적이 아니라 혈기왕성한 개구쟁이로 봐야 합니다. 그 극단적인 경우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란 이름으로 규정하고 있거늘, ‘과잉행동이란 말은 영문 ‘hyperactive’에서 보듯이 좋게 보면 에너지가 넘쳐흐르는상태를 뜻합니다. 마이클 펠프스는 이 심각한 마이너스적 자질을 수영을 통해 플러스적 자질로 전화함으로써 오늘날 수영 황제가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성향 또는 자질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답게 처신할 때가 가장 아름답고 현명하고 위대합니다.

 

끝으로, 통합적 관점 또는 양극성의 원리를 앞글에서 논한 교사의 권위문제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입장은 권위적인 성질과 권위적이지 않은(허용적인) 성질이 대립적인 관계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 상극적인 두 속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을 지니며 다른 하나는 전혀 품지 않는 교사의 입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권위적인 교사라 할지라도 어떤 상황이나 어떤 학생에 대해서는 허용적인 입장을 취하며, 반대로 아무리 허용적인 교사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에는 권위적인 입장을 취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권위와 관련한 교사의 입장은 이 대립적인 두 속성이 통합되어(synthesized) 나타나는 바, 권위적인 교사란 허용적인 입장보다 권위적인 입장이 더 강한 경우를, 허용적인 교사란 수용적인 속성이 더 강한 경우를 뜻할 뿐입니다.

여기서, “그럼 어떤 경우가 가장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가장 바람직한 권위의 형태는 이 두 속성이 적절히 통합된 형태가 되겠는데, 그 최적의 지점이 어디인지는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뭔지를 묻는 것은 인생의 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질문일 것입니다. 통합적 관점의 대가 노자(老子)의 말씀대로 라고 말하는 순간 진정한 에서 벗어나기 - 道可道非常道"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교육의 도 정답이 없는 문제로서, 매 순간 상황에 따라 주체(교사)에 따라 대상(학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그때그때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최선의 방안을 도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권위가 권위주의로 돌변하고, 반대로 한 발자국만 물러서면 온화한 교사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이니 교사는 늘 교실의 분위기와 아이들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서 그때그때 적절한 처신을 해가야 합니다. 마치 시소를 타듯이 관용권위사이를 적절히 왔다갔다 해야 합니다. 말로 설명하니 무슨 선문답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이는 학교 일상에서 대부분의 교사들이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 내용들이기도 합니다. 이거냐 저거냐 하는 양자택일의 삶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이거면서 동시에 저것이기도 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통합적인 관점으로 살아가기 마련이지만, 그 오묘한 법칙성을 알게 되면 교사인 사람은 학생을 이해하는 폭이 더 넓고 깊어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교사가 교사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타는 인내심  (0) 2014.02.25
비움과 채움  (0) 2014.02.22
좋은 수업을 위해 교사가 힘쓸 것은  (0) 2014.02.02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0) 2014.01.11
실패의 교육론  (0) 2014.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