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애타는 인내심

리틀윙 2014. 2. 25. 20:55

예부터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 했습니다. 그만큼 선생 노릇하기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되다는 뜻이겠죠. 제 초임 때와 달리 지금은 학교교육 여건이 여러모로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에도 여전히 이 말이 유효한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이삼십년 전에 비해 현재 교사의 사회적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교육환경도 눈에 띄게 개선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종합해볼 때 교직생활이 예전보다 더 힘들어졌다고 말하겠습니다. 해마다 명예퇴임을 하는 교사가 늘고 있는 통계치가 이를 잘 설명해줍니다.

어떤 상황이 교사를 힘들게 할까요?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저는 간명하게 딱 두 가지 상황으로 요약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하고 싶지 않을 일을 억지로 해야 할 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앞의 상황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라면 뒤의 상황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입니다. 편의상 이를 각각 능동적 스트레스, 수동적 스트레스로 일컫겠습니다.

능동적 스트레스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이 스트레스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교사로 발전해 갑니다. 그러나 수동적 스트레스는 교사에게 심각한 자괴감을 안겨다줍니다. 어느 경우든 스트레스 자체는 달가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기조절을 꾀해 갑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 용어로 적응이라 일컫는 기제인데, 사람은 건강한 삶을 위해 스트레스를 줄이며 심리적 평형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사에게 신체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건강입니다. 교육은 주로 신념과 철학의 문제입니다. 능동적인 스트레스든 수동적인 스트레스든 너무 쉽게 적응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뜻을 담은 이 편지의 주제는 애타는 인내심입니다.

애타는 인내심이란 브라질의 교육철학자 파울루 프레이리 Paulo Freire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원어는 ‘impatient patience’로서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참지 않으면서 참아내기가 됩니다. 이 모순어법의 절묘한 이치 또한 통합적 관점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참지 않으면서 참아내기가 그저 앞뒤 안 맞는 말장난이라고 치부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삶이 이러한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인간의 삶은 이러저러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맺음이 전부라 해도 좋을진대, 어떠한 관계에서도 참기만 하거나 참지 않기만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느 쪽에 많이 치우쳐 있는가 하는 경향성의 문제, 그리고 보다 중요한 관건으로 가치관 또는 세계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무엇을 참지 말고 무엇을 참을 것이며 왜 참거나 참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차이에서 교사의 정체성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교사, 훌륭한 교사란 이 ‘impatient patience’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사가 하고자 하는 일, 교사가 해야 하고 또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학생교육입니다. 학생을 가르치다 보면 애끓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수업시간에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는 아이, 수업분위기를 흐트리는 아이, 아무리 타일러도 행동이 개선되지 않는 아이를 대할 때 교사는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만큼 살아있는 교사라는 뜻입니다. 애가 타는 만큼 영적으로 건강한 교사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로 인해 신체의 건강이 훼손되어서는 아니 되기에 우리는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체념이나 포기, ‘할 만큼 했다는 자기합리화 기제에 너무 쉽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교사는 결코 발전하지 못합니다.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도 똑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능동적 스트레스상황은 교사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연륜이 쌓이면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적 고민 없이 얻어지는 해결책은 지혜가 아닌 요령일 뿐입니다. 능동적 스트레스는 치열한 경험과 아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풀어가야 합니다. 제가 앞글에서 아는 만큼 학생을 덜 미워할 수 있다한 말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거듭 말하건대 학생교육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현단계에서 내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맞아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 실패는 다음 성공의 밑거름이 될 겁니다. 치열한 고민과 번뇌 이후에 언젠가는 능동적 스트레스를 현명하게 대처하는 혜안이 생길 겁니다. 영적 건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신체적·심리적 건강을 이루는 상태, 애타는 조바심이 인내심과 조화를 이루는 평형상태가 ‘impatient patience’입니다.

 

사람이 힘든 것은 한마디로 사람 때문입니다. 일 자체로 힘든 것은 잘 없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모두에게 똑같이 맡겨지고 조직의 형편상 그 일을 해야 한다면 힘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게 더 많은 일이 맡겨지거나 내가 보기에 할 필요가 없는 일이 맡겨졌을 때 힘이 빠지는 겁니다. 교사가 힘든 것은 부당한 일이 부당하게 일이 맡겨졌을 때이고 그런 일을 맡기는 사람들 때문에 힘듭니다. 학교에서 관리자(교장, 교감)’라 불리는 분들입니다. 이들로부터 받는 수동적 스트레스로 인해 교사가 망가집니다. 사실 능동적 스트레스를 피해 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열정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이를테면 학업이 뒤처지는 아이와 치열하게 부대낀다고 해서 월급을 더 받는 것도 아니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수동적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스트레스는 힘 대 힘의 역학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스트레스를 냉담하게 무시해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용감한 사람'이라 일컫지만, 저는 우리 젊은 선생님들이 어떤 개인적 차원의 용기나 강단을 키우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불선한 관리자들과의 관계맺음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를 견뎌내기 위해 제가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처방 또한 애타는 인내심을 골자로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애가 타야하고 어느 선까지 참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겁니다. 이 또한 정답이 없는 문제로서 최선의 방책은 그때그때 구체적으로 논의될 일입니다. 저는 다만 젊은 교사들이 너무 쉽게 참거나 너무 쉽게 폭발하지 않기를 권고하고자 합니다. 수업 한창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인터폰으로 지금 즉시 공문 처리해서 기안 올리라는 지시를 들으면 화가 나야 합니다. 학생교육을 방해하면서 공문보고를 종용하는 관리자의 반교육적 처사에 분노심이 끓어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런 갈등 없이 아이들 자습 시켜놓고 공문처리에 몰두한다면 교사로서 올바른 처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맡은 아이들을 사랑할수록 교육에 대한 애착이 깊을수록 모순 상황에 대한 분노심은 증대됩니다.

부당한 지시가 반복됨에 따라 분노가 적개심으로 바뀌어 자기 목소리를 당당히 내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막상 관리자 앞에 서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날 겁니다. 그러나 악한 상대에게 분노를 품고 자신을 책망하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내가 비겁해서가 아니라 선해서 그러한 것이니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그런 갈등 속에서 혼란을 겪는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만큼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비합리적인 상황에 너무 쉽게 적응하여 별 스트레스 안 받고 지내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갈등과 고민 그리고 조바심은 많이 품을수록 바람직합니다. 인고의 시간이 흘러 내적 혼란이 정리가 되면 참으로 현명하고 강한 교사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가 ‘impatient patience’입니다.

교사는 걸어 다니는 교육과정 walking curriculum’입니다. 교사의 진솔한 삶 그 자체가 학생들에게 가장 위력적인 교육행위입니다. 우수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지만 훌륭한 교사는 감동을 줍니다. 부조리한 일상에 너무 쉽게 타협하여 ‘impatient’는 없고 ‘patience’만 잘 하는 순종형 교사는 우수한 교사는 될 수 있어도 훌륭한 교사는 될 수 없습니다. 교육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불의 앞에서 냉담하거나 침묵하는 처세술은 이미 반교육적입니다. 사회적 모순에 민감한(impatient) 교사만이 학생들에게 사표(師表)로서 감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impatient’는 갖추되 ‘patience’가 결여된 교사는 의롭다는 평을 들을지언정 학생들이나 동료교사들로부터 호감을 사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분들의 주위엔 사람이 적습니다. 사람 때문에 힘들다 했지만, 힘든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불선한 사람들과는 불편한 관계를 맺어도 되지만 선량한 이웃과는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합니다. 혼자서 강경한 태도만 고집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인내심이 뒷받침 되지 않은 용맹정진의 끝은 고립입니다.

 

애타는 인내심보다 더 중요한 자질은 겸손입니다. 보수적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교직사회의 특성상 젊은 교사들은 이 덕목의 가치를 간과하거나 반발심을 갖기 쉽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겸손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겸손은 자신에게나 상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용의 바탕 아래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겸손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을 바라 볼 때 그가 서 있는 입장을 함께 봐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입장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장 좋기로는 실제로 그 입장이 돼 보는 겁니다. 늘 후배로 지내다가 선배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학년부장이 되거나 했을 때, 교직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거느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아울러 관리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도 달라집니다. 이처럼 치열한 실천을 통해 관점을 수시로 바꿔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관점은 늘 왔다 갔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일정한 관점이 자리하게 됩니다. 나침반의 바늘이 좌우로 요동치면서 마침내 정북을 가리키듯이 말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impatient patience’겠죠. ‘애타는 인내심이 치열하게 실천되면 겸손이라는 자질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우리는 교사가 되기 위해 교대 또는 사대에 들어갔습니다교직이라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직을 선택할 순 있어도 교직사회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 뜬금없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교단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느꼈을 겁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단에 섰는데 현실 속의 학교라는 곳은 교사로 하여금 교육 외적인 일에 진을 다 빼도록 만듭니다. 교사라는 사람이 무슨 면서기마냥 늘 공문과 씨름을 하는가 하면, 혼신을 다해 교육실천을 열심히 하면 되지 거기에 무슨 허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과대포장한 실적물을 생산하라는 강요에 속이 상하고 애가 탑니다. 이것은 결코 일면적이거나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직사회의 민낯입니다. 이러한 교직사회의 현실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되어진 겁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는 어쩔 수 없이 강제된 이러한 상황을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이라 일컬었습니다. 말 그대로 내던져진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반지성적인 상황에 적응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자신에게 내던져진 불합리한 피투성을 자각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교사인 사람은 그러해야 합니다. 교사는 지성인이기 때문입니다. 기투성의 반대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세상에 던지는 자세가 기투성(企投性, Entwurf)입니다. 피투성을 극복하고 기투성을 곧추세우기 위해서는 부단한 ‘impatient patience’의 과정이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지난한 노정을 지치지 않고 꿋꿋이 가기 위해서는 뜻을 함께 하는 벗들과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합니다. 좋은 벗을 많이 만드십시오. 우리 삶에서 남는 것은 결국 사람밖에 없습니다. 교직사회를 나서는 마지막 순간에 교장이든 평교사든 직위를 내려놓지만 사람은 남깁니다. 한 교사가 교직 삶을 얼마나 잘 살았는가의 여부는 퇴임 이후 그의 곁에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숫자는 그의 교육실천의 진정성에 비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