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실패의 교육론

리틀윙 2014. 1. 4. 15:03

   이 세상에서 우리보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학습노동량이란 측면에서 한국은 단연 으뜸입니다. 그 결과 한국학생은 성적은 최상이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는 최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행복수치가 OECD국가 가운데 제일 낮다고 합니다. 행복도가 낮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학교는 교실붕괴라는 말로 요약되듯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모든 불상사가 빚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치열한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입시위주의 교육시스템에 있기 때문에 이 낡은 교육제도를 혁파하지 않으면 치유가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교사들이 구조적인 모순을 탓하며 최선의 교육을 위한 개인적 차원의 노력을 게을리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구조의 혁신 없이 학교는 바뀌지 않으며, 학교의 혁신 없이는 교실의 혁신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구조의 혁신이 이루어진들 교사가 자기 혁신을 외면하면 교육은 바뀌지 않습니다. 교육은 결국 교사의 손끝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혁신의 첫걸음은 관점의 전환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고 학교에서 행복을 못 느껴가는 이유를 알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교실 또는 학교 차원의 교육의 담지자로서 교사가 지녀야 할 가장 절실한 것이 실패를 바라보는 관점이라 생각합니다.

 

 

훌륭한 교사는 실패를 금과옥조로 여깁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실패와 성공으로 점철되는데, 대개 참된 성장은 성공보다는 실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위대한 성공은 길고도 쓰라린 실패의 산고를 통해 열매를 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전구 하나를 만들기까지 400번이 넘는 실패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디슨은 “400번의 실험은 결코 실패가 아니며 단지 전구가 켜지지 않는 400가지의 사례를 발견했을 뿐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에디슨의 의미심장한 이 말로부터 실패의 교육적 의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를 느낍니다.

실패 없는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실패는 성공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에디슨의 경우처럼 실패가 없으면 성공도 없는 것입니다. 현명한 교사라면 실패를 교육적으로 잘 활용하는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학생이 실패로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실패로부터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이 실패한 이유를 스스로 깨닫게 하고 실패에 대해 지나친 회한에 빠지지 않게 하며 다음에는 더 나은 방향으로 또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줘야 합니다. 학생의 삶은 물론 교사의 교육실천에서도 이런저런 실패는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학생의 실패에 대해서는 봄바람처럼 대하되, 자신의 작은 시행착오에 대해서도 교사는 가을서릿발처럼 스스로를 꾸짖는 성찰적인 태도가 요구됩니다.

 

 

훌륭한 교사는 자신의 실패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교사는 교사가 되기 전에 학생이었습니다. 학생시절 교사가 겪은 실패 경험은 훗날 교사가 되어 최선의 가르침을 위한 훌륭한 자양분으로 작용합니다. 이 경험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생활지도는 물론 학습 지도에서도 그러합니다.

학습과 관련하여 학생들이 난관에 부딪히는 지점은 대개 교사 자신도 어린 시절에 똑같은 곤란을 겪었던 것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유능한 교사는 어릴 때 자신이 그 문제를 어렵게 푼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실패의 지점을 기억하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계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에 맞춰 교수법이 강구될 때 최고의 가르침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배움을 받은 학생은 우리 선생님, 최고!” 라며 교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품어 옵니다.

기타를 잘 치는 20대 청년이 있었습니다. 기타를 배우고자 하는 어떤 선생님에게 그 청년을 소개시켜줬는데 그 분의 기타실력이 잘 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강습 현장에 가서 청년의 가르침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상대로 그 청년의 교수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학습자가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왜 실패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학습자의 실패는 분명 과거에 자신도 겪었을 것인데, 청년은 자신의 실패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훌륭한 연주자일지언정 훌륭한 선생은 아닌 것입니다. 지적 역량과 가르침의 역량은 별개의 문제임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훌륭한 교사는 실패자의 편에 서서 그의 피난처가 되어 줍니다.

교단에서 우리는 성공에 웃고 실패에 우는 수많은 제자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누군가 웃을 때 다른 누군가는 울게 되는 숙명의 제로섬게임에서 교사는 짚신장수 아들과 나막신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와도 같은 딜레마를 피할 수 없습니다. 시험 또는 평가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중등학교에서는 물론, 초등에서도 교사는 이 딜레마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이를테면 조회시간에 상 받는 아이는 매번 정해져 있는데 소수의 그런 아이들을 위해 박수만 쳐대는 절대다수의 아이들의 심정이 어떠할지,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학교교육과정)이 교육적으로 합당한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이처럼 우리의 학교교육시스템은 소수 학생들의 성공을 위해 다수의 학생들로 하여금 들러리 서서 패배와 좌절의 쓴맛을 보게 하는 잔인한 구조가 아니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소수의 엘리트들을 위해 평범한 학생들이나 열등생들은 소외되는 것입니다.

교육혼이라 함은 이 소외된 아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늘 승리하는 학생들은 교사가 따로 배려하지 않아도 제 갈 길 잘 헤쳐 나갈 이들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의 학교는 그 반대입니다. 성취한 아이들에겐 칭찬과 격려를 지나치게 많이 하는 반면, 실패하는 아이들을 위한 어떤 배려를 엿보기 힘듭니다. 교문 위에 서울대에 몇 명 입학시킨 것을 자랑질 하는 현수막은 늘려 있어도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패배자들이 그늘진 곳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고뇌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건강한 자에겐 의원이 필요 없나니”, 교사의 존재이유는 실패하는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루저를 끌어안는 교사, 이들에게 따뜻한 피난처가 돼 주는 교사가 진정한 스승입니다.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해 쓰라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패에 좌절하는 아이, 이런저런 한계상황에 봉착해 삶의 의지를 상실한 아이에게 교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공감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카운슬링의 기본은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지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것이 아니죠. 힘든 삶에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공감이지 충고는 아닙니다.

공감은 공감대가 형성이 돼야 제대로 작동될 수 있습니다. 최선의 공감대는 같은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비 맞는 사람을 돕는 최선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버리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 합니다. 교사의 입장에선 현재 학생과 같은 입장이 될 수는 없기에, “예전에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는 진심어린 한마디의 말을 해줄 수 있는 입장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하겠습니다. 학생과 같은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교사는 최고의 카운슬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영화를 즐기는 분이라면 로빈 윌리암스와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은 [굿 윌 헌팅]의 한 장면을 떠올리실 겁니다. 난폭한 계부로부터 잦은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는 반항적인 아이 윌 헌팅(맷 데이먼 분)에게 나 같으면 허리띠를 택하겠다. 너는 뭐로 맞았니?”라고 화답하는 숀 교수(로빈 윌리암스 분)에게서 우리는 학생 카운슬링의 전범을 봅니다. 이 대목에서 누구에게도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던 윌 헌팅의 응어리진 감정이 활화산처럼 분출합니다. 울음을 터뜨리며 진정한 멘토의 품에 안기자 숀 교수는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 못이 아니냐... It's not your fault!” 라고 하며 같이 울어줍니다교육이 있기 전에 만남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이 감동적인 한 장면은 만남이 성립하기 위해 교사의 쓰라린 경험이 갖는 교육적 의의에 대해 웅변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숙제를 잘 해오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 이해를 못 하겠다는 선생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어릴 때 숙제 안 하고서 학교 가는 걸 상상도 못했는데 그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학창시절 그 분의 삶은 모범 그 자체였을 겁니다. 실제로 교직생활에서도 매우 모범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교사는 없는 법이어서 모범적이기만 한 그 분에게서 어떤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 바운더리 내에서만 사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 배고픔을 겪어보지 못한 마리 앙뜨와네뜨가 프랑스 민중의 절규를 이해할 수 없었듯이, 학창시절 농땡이를 피워본 적이 없는 범생이 출신의 교사는 이른바 문제아를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한번쯤 야간 자율학습 빼먹고 재밌는 영화 보러 가는 즐거움과 쓰릴을 경험해보지 못한 교사,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을 벗어나 벗과 함께 일탈을 누리는 쾌락과 가치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교사, 그러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예 그런 일탈을 경험해 본 과거사를 지니지 못한 교사는 훌륭한 교사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을 조심스레 남겨 봅니다.

 

교사의 존재 이유는 온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에게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겐 의사가 필요 없듯이, 모범적인 아이보다는 실패하는 아이, 날마다 좌절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아이가 교사의 존재이유입니다. 이게 제가 말한 실패의 교육론의 핵심인데, 이는 결코 허황한 이상론이 아닙니다. 우리는 20분마다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상당수가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입니다. 성적비관으로 죽고 학교폭력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선택합니다. 여린 성격의 소유자들은 조용히 스스로 세상과 등져가지만, 거친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될까요? 대구지하철이나 숭례문 화재사건에서 보듯, 100명의 우등생보다 1명의 반사회적 아웃사이더를 안 만들어내는 게 실용적으로도 훨씬 덕 되는 일이 아닐까요?

실패하는 아이, 성공과 거리가 먼 루저들을 떠안는 교육론... 그늘진 곳에서 홀로 의기소침해 있는 아이들, 학교라는 울타리 내의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작은 아이들을 위한 교육담론이 활발히 논의되는 교육현장을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