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진보와 보수 : 전교조의 명암

리틀윙 2014. 9. 21. 15:20

통합적 관점이란 사물에 내재된 대립적인 두 속성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연관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사고방식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상호대립적인 두 속성을 분리해서 생각할뿐더러 둘 가운데 어느 하나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양자택일적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기도 합니다. 해체(deconstruction)의 철학자로 알려진 데리다(Derrida, J.)는 서양철학의 창시자인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의 전통이 되어 있는 양자대립구조를 이항대립(二項對立, binary opposition)이라 일컬었습니다. 데리다에 의하면, 그간에 철학자들이 정신-육체, 남자-여자, 서양-동양, 백인-흑인 등의 대립쌍에서 전자는 우월하고 후자는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도그마를 유포해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진리에 다다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항대립적 사고방식은 인식론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통합적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교육자가 돼서 사물을 통합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육영역에서 이항대립적 시각으로 인식론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오류를 범하기 쉬운 가장 흔하고도 불편한 대립쌍이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격동의 한국사에서 교육은 늘 정치적 풍랑에 휩쓸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 혼란의 중심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라는 교직단체가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바로 보기 위해선 전교조를 바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너무도 민감한 문제여서 시원스럽게 논지를 펼치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젊은 후배 선생님들이나 일반인들께서 현재의 우리 교육과 교직사회를 이해함에 있어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학교교육이나 교직문화는 전교조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가 판이하게 구분됩니다. 1988년 현장에 발령 받아 시작한 저의 교직 삶 또한 전교조와 함께 해왔습니다. 전교조에 대한 각별한 애증을 품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최대한 공평무사하고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전교조의 공과를 논하려 하지만, 어떻게 글을 엮어가더라도 읽는 분의 입장에 따라 혼란스러운 글이 될 것입니다. 그런 불편이나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 미리 제 관점을 간단히 일러두자면, 전교조는 한때 이 땅의 교육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했지만 일정 시기 이후 쇠락의 일로를 걸어오고 있는데 이 같은 퇴조현상은 자업자득의 결과라 봅니다. 전교조의 영고성쇠는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는 사물의 통합적 속성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으로 교육영역에서의 보수-진보의 문제를 의미있게 짚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작금의 학교현장에서 전교조가 존재감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당대의 전교조가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1989년 전교조가 태동할 당시의 교단은 암울하다 못해 참혹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인근 학교에서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임신한 여교사를 아이들 보는 앞에서 운동장 돌리는 교장도 봤습니다. 요즘 교권이 무너지니 어쩌니 하지만 사실 그때는 교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교권은 소수의 학부모와 아이들로 인해 침해를 받고 있지만 그 당시 교사들의 인권과 자존은 학교장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에 의해 짓밟혀갔습니다. 전교조는 바로 이 같은 언어도단의 교육현실을 배경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전교조 노랫말처럼 최소한의 상식과 정의 그리고 진실을 갈망하는 참교사들이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

노태우 군사정권의 입장에선 오랜 세월동안 시키면 시키는 대로 굴종의 삶을 살아온 교사들이 노동조합 설립과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주창하며 집단적 저항을 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건 독재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죠. 그래서 무자비한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는 교사는 해직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15백 명의 교사들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생이별을 하며 교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 분들은 하나같이 학생-학부모들로부터 존경 받는 분들이었습니다.

한편, 전교조 깃발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탈퇴각서를 쓴 교사들은 19604.19 이후 근 30년 만에 타오르기 시작한 교육운동의 기운을 확산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을 전개해갔습니다. 그 시절 학교에서 교장·교감의 최우선 관심사는 지금처럼 학력이나 학교폭력문제가 아니라 자기 관리 하에 있는 교사가 전교조 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전교조 교사들은 흡사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하듯이 숨어서 활동을 했습니다. 반대로 교장·교감은 전교조 교사를 발본색원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소임으로 여겼습니다. 당시엔 그 문제가 관리자의 입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교부가 일선 교육청에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란 지침을 공문으로 내려 보냈는데 그 내용은 그 시절 진보-보수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줍니다.

 

# 1989년 문교부가 일선 교육청에 보낸 공문 내용 (출처: 신동아 19897월호)

제목: 전교조 교사 식별법

·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 신문반, 민속반 등의 특활반을 이끄는 교사

·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 탈춤, 민요, 노래, 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 직원회의에서 원리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

· 자기 자리 청소 잘 하는 교사

· 학부모 상담을 자주 하는 교사

· 사고 친 학생에 대한 정학 또는 퇴학의 징계를 반대하는 교사

·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보는 교사

 

전교조 교사 문제 외에 그 시절의 학교관리자가 윗선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또 다른 잣대는 단위학교 교사들의 교련(현재의 교총) 가입률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전교조 교사들은 비밀리에 활동을 했는데, 교련을 가입하지 않는 교사는 곧 전교조 교사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자신이 전교조 활동에 가담하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억지 춘향으로 교련에 가입해야만 했습니다.

이렇듯 한 편의 코미디판과도 같은 교육현장을 현재의 모습으로 바꾼 것은 전교조이지 교총은 아닌 것입니다. 당시 교총은 교련(대한교육연합회, 대한교련)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교련은 교장에 의한 교장을 위한 교장의교원단체였습니다.(교련의 이러한 정체성은 현재의 교총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관리자의 편에 서서 승진의 길을 가려는 부류가 아닌 대다수의 교사들은 전교조 편이었습니다. 비록 교장에게 미운털 박히기가 두려워 몸은 교련에 들더라도 마음은 전교조에 있었던 것이죠. 요컨대, 이 시기의 교사대중에게 보수는 부패와 불의 그 자체였고, 진보를 상징하는 전교조는 암울한 교육계의 빛과 소금으로서 신망을 얻고 있었습니다.

 

 

 

 

1988년 창립 이후 1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버티면서 1999년 합법화와 더불어 전교조는 마침내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쟁취하였습니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는 붙어 다니는 게 사물의 근본속성이어서, 역설적으로 전교조는 합법화 이후부터 그 본래성을 상실하며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했다고 저는 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 전교조가 퇴조해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구시대의 낡은 교육을 혁파함으로써 교육 진보의 담지자로서의 자기 역할을 할 만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수적 포지션에서 전교조를 백안시하는 많은 분들은 이러한 점을 잊고 있습니다. 전교조가 교육의 진보를 자임하면서 기존 교직사회의 악습을 고쳐나갈 때, 그 대척점에 있는 교련이나 교총이 지금까지 학교교육을 쇄신하기 위해 기여한 점은 전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촌지 받지 않는 교사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를 색출해서 보고하라는 지침을 하달하고 또 그걸 맹목적으로 수행하는 이들이 보수라면, 그 보수가 진보에게 할 말이 있을까요? 그런데 교육계에서 전교조를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분들입니다.

그 긍정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 전교조를 비판하는 분들은 전교조가 지나치게 정치투쟁을 지향한 탓에 초기에 전교조를 지지하던 국민대중이나 교사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해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전교조가 초심을 잃었다는 거죠. 선량한 교사들과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았던 전교조의 초심이란, 앞서 제가 말한 부조리한 교육현실을 혁파하고 교사의 열정을 아이들을 위해 쏟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교조는 그것을 일정 정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전교조의 과오는 초심을 버린 것이 아니라 초심을 실현한 이후의 후속조치로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2의 참교육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간의 경과가 어찌 됐건 현재 전교조가 국민대중과 교사집단을 설득하고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한 것은 치명적인 불찰입니다.

저는 전교조의 무능과 과오가 근본적으로 낡은 운동방식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낡은 학교를 바꿔가는 개혁을 주도했던 전교조가 정작 자기 자신을 혁신하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아니 실패했다기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의지를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거칠게 말해 지금 전교조는 보수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교육민주화를 표방하는 전교조 내부의 조직문화는 반민주적 행태로 얼룩져왔습니다. 전교조의 구태와 악습이 근절되지 않는 밑바닥에는 종파주의라는 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단 전교조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진보진영 전체가 몰락해가는 근본이유가 종파주의탓입니다. 따라서 좌파든 우파든 진보에 대해 맹목적인 호불호의 정서를 품고 계시는 분들은 종파주의를 이해함으로써 보다 합리적인 시각으로 진보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전교조 내 종파주의의 존재와 그 실체를 알고 나면, 한때 이 땅의 교육희망으로 국민들로부터 뜨거운 지지와 신뢰를 받던 전교조가 왜 지금 불신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합법화 이후 전교조는 국민의 전교조도 교사대중의 전교조도 아닌 한 줌 종파 활동가들의 전교조라 하겠습니다.

 

종파주의(sectarianism)사회변혁운동이나 민주주의운동에서 정당이나 집단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대중과의 결합 및 대중활동을 경시하고 통일전선을 가로막으며 광범한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사업방식을 뜻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가치를 쫓는 어떠한 집단에서도 종파주의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한국사회 진보진영의 종파주의는 그 부정적 경향성이 더욱 심각한 편인데, 이는 오랜 군사독재 시절 사회운동이나 교육운동을 비밀리에 실천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상황과 관계있습니다. 그 칠흑 같은 암흑기에는 몰래 운동하는 것이 자랑이었고 또 존경의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가고 없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며 교육영역에서 전교조는 합법화 이후 양적으로 거대한 대중조직으로 위용을 자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조직 내의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교육운동의 방향성을 정립함에 있어 선량한 전교조 교사대중의 바람은 무시한 채 극소수 종파 활동가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독재가 만성적으로 자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교조를 이끌어 온 이들은 학교가 붕괴되고, 교권이 바닥에 내려앉고, 학생들이 망가지고 죽어가는처참한 교육현실은 방치한 채, 하고 한 날 교육 외적인 정치투쟁 따위에 힘을 소진해 왔습니다. 이 소모적이고 무모한 행보를 통해 얻은 것이라곤 국민들로부터 욕먹은 것 밖에 없으니, 독재적 리더십을 골자로 하는 종파주의의 귀결점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인 것입니다.

전교조를 망쳐온 종파주의에 내재된 두 번째 나쁜 속성은 배타적 아집으로 요약됩니다. 자석을 쪼개도 여전히 N극과 S극이 각각 존재하는 것처럼, 진보 안에도 진보와 보수가 따로 존재합니다. 전교조 내에도 좌파와 우파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정파라 일컬으며 조직의 발전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통한 상호대립을 펼쳐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이라는 수사가 무색하게도 이들 양대 종파가 보여준 대립은 지리멸렬하고 소모적인 이전투구가 전부입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전교조 내 정파(政派) 문화는 자구 그대로의 의미인 정치적 파당이 아니라 종파주의의 화신이고, 더 적확하게 말해 패거리문화에 터한 파벌 다툼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종파주의의 가장 극심한 폐단은 우민화라는 말로 표상되는 것입니다. 전교조 내 관념적 급진 종파주의자들은 늘 우매한 대중을 탓합니다. 이를테면, 똑똑한 지도부가 결정한 총력투쟁을 조합원대중이 우둔해서 따라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대중은 우매한 것이 아니라 다만 무관심할 뿐입니다. 전교조와 같은 거대 조직에서 조합원대중이 조직 일에 무관심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량한 지도자라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할 것이나 종파주의 지도자들은 대중의 그러한 무관심을 악용해 독재적 리더십을 지속시켜 온 점입니다. 그러니까 대중의 무관심은 종파주의의 원인이자 결과인 것입니다. 저는 종파주의자들의 부조리 가운데 가장 심각한 죄과가 바로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 대중의 우민화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우민화를 악용해 종파주의를 강화해온 점. ‘대중의 우민화는 종파패거리들이 종파주의 놀음을 지속시켜올 수 있었던 근거인 동시에, 종파주의의 발목을 잡는 양날의 칼입니다. 총력투쟁이든 뭐든 대중의 참여가 있어야 전교조라는 수레바퀴가 굴러갈 것인데, 지도부가 아무리 목에 핏대 올리며 "총력 투쟁"을 외쳐도 절대 다수의 조합원 대중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투쟁이라는 것이 늘 소수의 활동가들만 동원하여 아무 소득 없이 투쟁을 위한 투쟁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되풀이 해온 것이 전교조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결국 우민화를 조장한 종파주의자들은 제 눈 제 찌른 셈입니다. 문제는 종파주의의 몰락과 전교조의 몰락이 운명을 같이 하는 점인데, 이게 제 주관적인 기우이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교육영역 내에서 진보-보수의 문제를 짚어 봤습니다. 나름 공평무사한 시각으로 논하고자 했으나 읽는 분의 입장에 따라 적잖이 불편한 보고서가 되었을 겁니다. 혹자는 보수보다 진보에 대한 비판으로 편향된 점이 뜻밖이다하실 것 같습니다. 교육영역에서 보수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계시는 바이기에 특별히 논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전교조가 비민주적이라 해도 교총보다 못할 수는 없습니다. 진보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보수가 진보보다 더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안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 운동을 하던 낡은 시대는 갔습니다. 그렇다고 새 날이 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진보와 보수가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예전처럼 전교조교사는 절대선, 관리자는 절대악이라는 이항대립구도가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습니다. 요컨대, 복잡다단한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낡고 단순한 방식으로 투쟁만 부르짖는 운동은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매한 대중의 정서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오만한 종파주의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실로 이런 분들이 이 사회 운동판을 망쳐온 것이고 종파주의란 바로 이런 경향성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치고 철학적으로나 지적으로 깊이 있는 식견을 가진 경우는 결단코 없습니다. 제 경험으로, 운동판에 몸담지 않으면서 기존 교육에 문제의식을 품고 학교와 교육이 바뀌기를 열망하는 평범한 전교조 교사와 활동가와의 차이는 투쟁이라는 구호에 얼마나 익숙해 있는가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대중을 우매하다고 보는 시각은 윤리적으로는 물론 인식론적으로도 터무니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보-보수라는 대립적인 두 속성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통합적 시각으로 바라 봐야 합니다. 새가 좌우익을 번갈아 날개짓하며 균형을 잡아 하늘을 날듯이 진보와 보수는 학교사회가 균형을 잡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며 상생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둘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항대립적 사고는 금물입니다. 사실상 교육은 본질적으로 진보보다는 보수적 성격이 강합니다. 본질주의니 항존주의니 하는 교육사조가 말해주듯이, 오늘날 우리가 학생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의 대부분은 예부터 우리가 소중히 품어온 가치체계일 뿐입니다. 명품교육이니 뭐니 하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최상의 교육은 교사와 학생 간에 따뜻한 인간관계에 바탕할 때만이 그 바람직한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교사-학생의 관계도 그러하지만 교사와 교사, 관리자와 교사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도 인간관계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인간관계는 운동의 시작과 끝입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첫째 자질은 겸손과 관용입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이웃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의 실천에 대해 가을서리처럼 엄격하게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진보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사회에선 진보라는 호명이 너무 남발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교사가 교사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문객  (0) 2014.09.30
아웃사이더에게 무대를  (0) 2014.09.23
교직의 정체성, 교육의 리얼리티  (0) 2014.09.14
교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0) 2014.09.12
애타는 인내심  (0) 2014.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