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교사에게

방문객

리틀윙 2014. 9. 30. 05:52

지난겨울에 열흘 일정으로 북유럽 교육탐방을 했습니다. 덴마크-스웨덴-핀란드 3개국을 둘러보았는데, 각각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우리 학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그 중 핀란드의 한 고등학교에 대한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있는 야르벤빠 고교(Järvenpään Lukio)는 전교생 수가 1천명쯤 되는 학교인데, 학교 교육시스템이나 학생들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가 매우 놀라웠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이 학교가 혹 특별한 학교인지 어떤지 확인할 겸 권위 있는 루트를 통해 질의했더니 학생 학업 성적이 중상(中上) 수준의 학교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사진에서 왼쪽이 보통의 학교시스템이고 오른쪽이 이 학교시스템인데, 1)학급편성 2)학과목 선택 3)수업연한 면에서 파격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고정된 학급 개념이 없고 학생들이 학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으며 또 수업연한도 탄력적이어서 학생의 의사에 따라 2년 만에 졸업할 수도 있고 4년 동안 다닐 수도 있습니다. 수업은 학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생들이 듣고 싶은 과목을 수강신청 합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인데도 복도가 아닌 로비의 모양새를 띤 곳에서 나름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학생들이 쉬는 시간을 보내는 모습입니다.

우리네 학교의 쉬는 시간 풍속도는 도떼기시장의 그것이죠. 수업시간이란 게 교사 일방의 주도하에 강압적으로 흐르다보니 쉬는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그 갑갑증을 해소하기 위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과잉행동을 일삼습니다. 장난치는 아이, 큰 소리로 떠들거나 고함지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무슨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듯 복도를 전력으로 달려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학교의 쉬는 시간 풍경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핀란드 학생들은 삼삼오오 앉아 조용히 담소를 나누거나 로비 곳곳에 설치된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거나 탁자에 앉아 책을 펴 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1천명이나 되는 학교인데도 소란한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표정들은 하나같이 밝고 활기찹니다. 솔직히 이러한 정중동(靜中動)의 모습들은 그 수준면에서 우리 대학생들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이었습니다. 중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한국 학생들은 틈만 나면 스마트폰으로 게임 따위에 몰입하지만(물론 학교 밖에서) 여기서는 그런 아이들을 한 명도 못 봤습니다.(아침에 등교하자마자 담임교사가 학생 휴대폰을 걷는 일은 이곳에서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쉬는 시간에 핀란드 학생들은 차분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생산적인 활동에 몰두하는데 반해 한국 학생들은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는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핀란드 학생들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자율성을 누립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자기 책임을 다합니다. 흔히 말하는 자율과 책임의 조화를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학생들에게 핀란드 식 자율을 부여하면 책임은 없고 방종으로만 흐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핀란드인과 우리는 DNA가 다르기 때문에 억압해야하는 것일까요? 말도 안 됩니다. 기성세대의 그러한 식민지적 사고가 청소년의 식민지적 습성을 자아내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맥락에서 유명한 사회심리학 이론 자기충족예언(주1)을 되짚어볼 필요를 느낍니다.

 

 

 

 

히긴스 교수님에게 저는 언제나 꽃 파는 여자아이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 분은 늘 저를 꽃 파는 아이로 대해 왔고 또 앞으로 그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커링 대령님께 저는 항상 숙녀일 거예요. 대령님께선 늘 저를 숙녀로 대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죠.

 

자기충족예언을 주제로 한 흥미 있는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속에 나오는 뜻 깊은 대사입니다. 유능한 언어학자 히긴스 교수와 피커링 대령은 거리에서 꽃 파는 미천한 일라이자의 거친 행동양식과 형편없는 영어발음을 교정하여 상류사회에서 멋진 숙녀로 인정받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내기를 합니다. 히긴스의 계획은 대성공하여 무도회에서 일라이자가 왕자의 요청을 받고 왈츠를 추기까지 합니다. 히긴스가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때 그 기적 같은 변신의 당사자인 일라이자가 인용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 정작 자신을 변화시킨 것은 히긴스의 과학적인 언어교정법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숙녀로 대한 피커링 대령의 인격적 대접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두 사람 가운데 자신을 숙녀로 대접해 준 사람 때문에 자신이 숙녀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 http://blog.daum.net/liveas1/6499120)

 

 

 

 

 

피그말리온 효과로 유명한 로젠탈과 제이콥슨(Rosenthal & Jacobson)이 말하듯, 교사는 교실의 피그말리온(Pygmalion in the Classroom)’입니다. 교육자들이 학교에서 학생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우리 학생들이 신사숙녀(ladies and gentlemen)’가 될 수도 있고 말썽쟁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혹 쉬는 시간에 두 나라 학생들이 보이는 놀라운 격차는 학생들을 신사숙녀로 대하는 것과 잠재적 일탈자로 취급하는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은 아닐까요?

  

학생을 보는 시선의 차이가 반영된 두 나라 학교문화의 차이는 학교 건물의 구조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북유럽의 학교들은 건물 구조가 우리와 매우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곳의 학교들은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본관 건물이 바로 눈앞에 드러납니다. 운동장은 본관 건물 뒤에 마련돼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학교의 운동장들은 예외 없이 교문과 본관건물 사이에 있어서 내방객이든 학생들이든 이 넓은 연병장을 지나야지만 헤드쿼터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학부모가 자기 자녀를 만나러 학교에 갈 때 오뉴월 내리쬐는 태양 빛을 오래도록 맞아가며 걸어가 겨우 학생을 접견할 수 있도록 만든 이유는 뭘까요? 저는 북유럽의 학교를 보기 전엔 학교는 모두 이렇게 지어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숲 속에 있을 때는 숲이 안 보이는 법, 이렇듯 다른 세상을 구경하니까 우리 학교의 풍속도가 보입니다.

 

 

 

야르벤빠 고등학교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벽면에 큰 그림 액자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동사무소처럼 계도용 환경게시물이 붙어 있는 우리와 대조적입니다. 학교라기보다는 도서관 혹은 박물관에 들어선 기분입니다. 건물 모양이 원형으로 지어져 우리처럼 길게 쭉 뻗은 복도 따위는 볼 수 없습니다. 대학교가 아닌 고등학교도 이렇게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우리의 학교는 건물 내부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곧게 뻗어 있어서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이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만 이 나라의 교육자들은 학생들의 동태 파악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요?

 

 

 

이 글을 쓰면서 고교시절 야간 자습 빼먹고 복도를 벗어날 때 그 가슴 졸이며 살금살금 기어가던 기억이 피어오릅니다. 점심시간에 교문 앞 문방구에서 파는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서 학교 뒷담을 도둑고양이처럼 타 넘던 기억이 납니다. 발달단계상 너무도 자연스럽고 건강한 발상이었지만 그 시절 그런 행위는 일탈로 규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의식 속에서 그 모험을 감행해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건강한 쾌락(pleasure)을 충족하기 위해 선생님을 속여야만 하는 구조가 문제인 줄도 모르고 마음 한 켠에 죄의식을 키워갔던 것입니다. 왜 우리 학생들은 이토록 인신을 구속당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학생이 일과시간에 학교 밖을 나서는 것이 왜 쇼생크탈출을 방불케 하는 모험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왜 학교는 창살 없는 감옥이어야 하는 것일까요?

 

 

 

손님맞이 하듯 학생을 맞는 학교를 소망해 봅니다. 학교를 방문한 장학사를 맞이하듯 학생을 환대했으면 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삶이 오는 겁니다. 교사는 학생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학교란 학생이 교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경작해 가는 곳입니다. 학교는 학생을 감시하고 자유를 통제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의 자유를 길러주고 그들이 지닌 가능성을 한껏 펼쳐가도록 안내해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주1)

자기충족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은 사회학자 머톤(Merton, R.)이 개발한 이론으로, 정상적이라면 이루어지기 힘든 어떤 일이 행위자의 강력한 믿음에 힘입어 그 믿음과 행동 사이에 긍정적인 피드백이 일어나 마침내 그것이 실현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이 이것과 관계있습니다. 

머톤 이후 사회심리학에서 자기충족예언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었습니다. 권위 있는 의사의 말 한마디가 환자의 고민을 해소하여 병을 낫게 한다는 플레시보 효과(placebo effect)가 대표적인 것이죠. 교육학이론으로 자기충족예언은 1964년 저 유명한 오크 학교 실험 보고서인 <교실의 피그말리온 Pygmalion in the Classroom>을 통해 교육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우리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로 알려진 이 이론은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생의 학업성적이 향상될 수 있음을 밝혔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이론의 원류는 그리스신화의 피그말리온입니다.

 

'교사가 교사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육은 관계다  (0) 2014.10.09
이론과 실천  (0) 2014.10.04
아웃사이더에게 무대를  (0) 2014.09.23
진보와 보수 : 전교조의 명암  (0) 2014.09.21
교직의 정체성, 교육의 리얼리티  (0) 2014.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