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가난한 사람들은 왜 부자들을 위해 투표하는가?

리틀윙 2014. 8. 1. 18:07

6.4 지방선거에 이어 어제 치른 보궐선거에서도 집권여당은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보기 좋게 회생했다. 세월호의 충격 속에서 치른 선거에서도 89로 대등한 선전을 펼치더니 세월호 거품이 빠진 보궐선거에서는 압승을 한 것이다. 대통령선거에서의 부정이나 국정원 간첩 조작이 밝혀지고, 세월호라는 핵폭탄급 국가적 재앙을 맞아 침몰해 가는 선박에서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는 총체적 무능과 관피아로 표상되는 비리 커넥션의 징후가 인식되어도, 또 사태 수습을 위한 미봉책으로 총리와 부총리를 교체하는 과정에서도 썩을대로 썩은 치부를 보여주는 등, 한마디로 썩을대로 썩은 집권정부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도...... 국민대중은 이 한심한 수구꼴통 정당을 지지한다. 짜증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한 이 한여름 밤의 기괴한(weird, 이 영단어를 기억하라!)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미스테리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조야한 형태의 설명은 국민 개새끼론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국민개새끼론은 홍세화의 고상한 표현으로 계급 배반 투표와 맞닿아 있는데, 이는 왜 국민대중이 자기계급을 배반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하지 못하는 허점이 있다. 이것은 논리체계라기보다는 비이성적인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 ‘개새끼라는 저주는 안철수/김한길에게 퍼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새끼든 소새끼든 국민은 국민이다. 국민이 미개해서 새누리당에게 압승을 안겨다 준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미개한 국민 버리고 달나라에 가서 정치할 것인지 자문해 보기 바란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회 진보를 위한 고민의 출발점은 지금 여기일 수밖에 없다.

 

 

 

 

어제의 참담한 선거결과에 충격을 받은 탓인지 오늘 페이스북에서는 그 인과관계를 조명하려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그 중 유한계급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베블렌의 논리가 눈길을 끌었다. “하층계급은 유한계급으로부터 착취당한 결과, 그들의 경제적 여력이 바닥나 학습은 물론 새로운 사유 습성의 채택에 필요한 노력을 할 수 없는 지점으로 몰려 결국 보수적으로 사고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베블렌의 이러한 설명은 새로운 사유 습성을 채택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얼마든지 가능한현대 정보화 사회에서는 설득력을 상실한다. 가난해서 못 배우고, 못 배워서 무식하고, 무식해서 결국 보수화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것이 하층계급의 운명이라면...... 배울 대로 배운 사람이 보수화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중이 집단적으로 보수화 되어 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이론체계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다. 베블렌은 그람시의 [옥중수고]가 나오기 바로 전인 1929년에 사망했던 탓에 헤게모니에 대한 아무런 개념을 갖지 못했다. 교육은 등록금을 지불하고 배우는 학교 혹은 대학 외에도 우리 일상의 곳곳에서 이루어진다. 교육학자가 아니었던 탓에 그람시는 이 말을 쓰지 않았지만, 대중의 일상에서 은연중에 이루어지는 이것은 일종의 잠재적 교육과정이다. 중요한 사실은, 잠재적 교육과정은 정규 교육과정(표면적 교육과정)보다 훨씬 강력하게 학습되는 점이다. 세월호 국면에서 유병언의 장남이 뼈없는 치킨을 시켜 먹었다 아니다 하는 것이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정확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처절한 저항을 묻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채널ATV조선 따위의 종편 프로그램이 중장년층에게 미치는 교육적(헤게모니적) 파급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박정희 때와 달리 현재의 파쇼정권은 보수적 관념을 대중에게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하는, 이것이 헤게모니다!

 

 

 

 

그러나, ‘뼈없는 치킨논쟁에 힘입어 7.30 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압승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미개한 국민운운하지만, 대중은 “(헤게모니론도 모르는채 술이나 퍼마시면서) 진보를 자임하는자들보다 그리 어리석지 않다. 꼴통보수 새누리당이 뭔 짓을 저질러도 국민대중으로부터 굳건한 지지를 획득해내는 한국사회의 이 기이한 현상은 헤게모니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 별도의 논리로 보충되어야 한다. 글쓴이는 이를 싸가지론으로 일컫고자 한다.

 

부도덕하고 무능한 보수정당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잘 먹고 잘 사는 유한계급이 아니라 먹고 살기 힘든 하층계급이라는 역설적 현상은 비단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선진된 미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고 있다. 미국사회에서도 이 기이한 현상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역량있는 학자들이 정교한 담론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들의 논리는 공통적으로 지금 글쓴이가 말하는 싸가지론으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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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꼴통 집권당이 뭔 사고를 쳐도 도무지 바뀔 조짐이 안 보이는 이 갑갑한 현실이 이해가 안 간다면, 술을 마시지 말고 책을 읽어야 한다. 세상이 미쳐간다 싶고 도무지 앞이 안 보일 때, 최선의 답은 언제나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가난한 민중들이 왜 그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보수정당에 표를 몰아주는지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 지금 소개하는 두 권의 책을 통해 그 기괴한(weird, 이 영단어를 기억하라)’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기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면 미개한 것은 국민대중이 아니라 책은 멀리 하고 투쟁! 따위를 부르짖으며 술에 의지한 채 현실 도피적 일상을 영위해가는진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책은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 The Righteous Mind]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농촌 주민과 하층 노동계급이 보수 정당에 표를 던지는 이유를 설명함에 있어 저자는 도덕성이라는 지표를 제기한다. “하층계급이 보수진영에 호감을 품는 이유는 이들이 진보진영보다 더 도덕적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보수당에 대해 품는 도덕적 판단에 있어 이른바 진보적인 사람들과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잣대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책의 부제 또한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이다.

보수당의 정치인들이 도덕적이라고 하면 아마 쓴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건 미국 이야기고, 한국의 보수정치인은 쓰레기들밖에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빤스 바람으로 여대생 성추행하다 국제적 망신 싼 윤창중이나, 강원도 별장에서 벌어진 섹스파티에 연루된 김학의, 그 외 최근 국무위원 후보로 지명된 자들이 청문회에서 털린 신상을 보면 새누리당은 가히 쓰레기백화점이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대중에게 이러한 면면은 어디까지나 파편적인정보 혹은 팩트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일 뿐 보수정당의 도덕성을 표상하지 않는다.

 

조너선 하이트에 의하면 대중이 도덕성을 판별하는 기제는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인 추론은 그 다음이다.” 직관에 맞지 않는 이런저런 팩트들은 인식 과정에서 폐기돼 버린다. 원본보다 복제본(시뮬라크르)이 더 원본처럼 위력을 떨치는 현대사회에서 대중이 직관으로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인식 과정에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선거라는 게임에서는 그러하다. “본질적으로도덕적인 인물보다, “현상적으로도덕적인 척 비치는 인물이 당선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 선거판이 아닌가? 장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이 시물라시옹의 원리를 잘 이용하는 선거공학의 명수들이 새누리당이다. 내가 새누리당이 새정연이나 진보 정당보다 훨씬 유능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조너선 하이트는 진보진영이 인간의 직관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에 보수진영에게 못 이긴다고 한다. 하이트에 의하면, 서양적(Western)이고 고학력(Educated)이고 산업화(Industrialized)되고 부유(Rich)하고 민주당 지향적(Democratic)인 특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직관보다는 분석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진보파의 성격을 특징짓는 이 ‘WEIRD’ 문화는 체계화 능력은 높지만 공감 능력은 낮고, 세상을 관계보다 개별 사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놀랍게도, 한국사회 운동판 내의 NL/PD 양대 종파패거리의 역학관계도 이 논리로 설명이 된다. 자석을 쪼개도 N극과 S극이 따로 존재하듯이, 진보(좌파) 진영 내에서도 진보(좌파)와 보수(우파)가 공존한다. 실로, 한국사회 진보 운동판은 시종 이 좌경-우경 종파의 아귀다툼으로 얼룩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양자는 성향이나 기질 면에서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NL은 무능하지만 따뜻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PD는 약간(아주 약간) 똑똑한 듯 보이지만 대체로 까칠하며, 결정적으로 싸가지가 없다. 전자와 후자는, 하이트가 말하는 관계지향개별적, 독립적’, ‘공감능력체계화 능력의 이항대립 속성이 그대로 일치한다. 문제는, 무능하고 보수적인 NL이 대중에게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가는 점이다. (내가 볼 때)무능한 이들이 대중을 장악해 올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조너선 하이트가 말하는 도덕성이다.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노동운동판의 이모저모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전교조 내 종파패거리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논문을 쓰라면 10편도 넘게 쓸 수 있을 정도로 잘 안다.)

도덕성이란 차원에서 양대 종파는 둘 다 도덕적이지 못하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운운하지만 이들의 패거리 정치문화(=종파주의)는 철저히 조합원 대중에 대한 소외와 기만, 그리고 참교육을 염원하는 선량한 교사들과 국민대중에 대한 배신으로 점철되어 왔다. 나의 관점에서 선량한 종파선량한 조폭이란 말만큼이나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줌 밖에 안 되는 종파 내의 실세가 아닌, 현장에서 조합원 대중과 접촉하는 활동가들 가운데 그래도 대중의 신뢰를 얻는 쪽이 우경 종파라는 말이고, 그게 이들의 도덕성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NL은 진보진영 내의 새누리당이라 하겠는데... 무능하고 한심한 이들이 전교조 내에서 조합원대중에게 어필하는 이치는 그대로 똑같이 무능하고 한심한 새누리당이 국민대중에게 어필하는 것과 조응한다는 것이다. 국민대중이 미개하다면, 전교조 조합원 대중도 미개하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둘 다 미개하지 않다. 도덕성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까칠하기만 하면 진보적인 줄 착각하는 운동꿘이 미개한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할 책은 이 글의 제목대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What’s the Matter with Kansas”인데, 한국판에서는 부제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 내용을 이해하려면, ‘캔자스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카운티가 있는 곳, 가축을 치는 농민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점점 몰락해가는 농촌마을이 있는 곳, 이곳에서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가 80퍼센트가 넘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였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기가 사는 지역을 몰락한 공업도시로 만들며 자신에게 치명타를 날릴 정책들을 남발하는 후보자에게 압승을 안겨주며 갈채를 보낸다. 그곳이 바로 캔자스이다.

 

 

 

 

위의 사진은 2000년 대선 때 카운티 별로 공화당과 민주당의 선거인단 득표 현황이다. 미국 대선은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진다. 주별 투표에서 승리한 후보가 그 주에 할당된 전체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승자 독식 winner-takes-all’ 방식이다.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앨 고어는 조지 부시보다 40만 표를 더 획득하고도 선거인단 득표수에서 밀려 패배했다. 위의 지도에서 KS라 표시된 주가 캔자스이다.

 

이 책을 보면서 미국사회의 정치지형은 신기할 정도로 많은 측면에서 한국사회와 닮은꼴이라는 점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 닮은 점들이 대체로 역설적 형태를 취하는 점이 또 충격적이다.

 

첫 번째 역설적 공통점은 가난한 지역에서 보수정당 지지자가 더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캔자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캔자스는 우리 나라에서 새누리당 지지율이 가장 높은 지역 대구/경북과 많이 닮아 있다.

 

두 번째 역설은 미국이나 한국은 강력한 반공주의가 국민의식을 지배하는 나라로서 빨갱이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편인데, 역설적으로 보수당이 빨강색으로 상징되는 점이다. 내 생각인데, 새누리당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붉은 색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탈바꿈한 것은 미국 보수당을 벤치마킹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건 새누리당의 이 전략은 대박이었다. 생각해보라. ‘문재인 빨갱이라고 믿는 보수꼴통 지지자들이 새누리당이 붉은 색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해서 거부감을 갖겠는가? 그러니까 지지층은 그대로 지키면서 젊은 층에게는 우리 당이 빨갱이에 대해 별 거부감을 갖지 않을 만큼 개방적이고 또 정열적인 당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줌으로써 이삼십대의 표심을 사로잡는 것이다.

 

우파는 장기간에 걸친 정치조작에 성공했고, 민주당은 실패했다. “좌파들이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며 자신들이 잘났다고 만족해하는 동안 우파는 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고서 매우 부지런히 그 일에 몰두했다. 보수주의 운동문화의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를 주목하라.

 

 

세 번째의 역설은 보수 중의 보수 지역이라 할 미국 캔자스와 한국의 TK지역은 한 때 좌파적 색채가 강했던 저항의 고장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우향우로 변신하였다. 기독교 신앙심이 강한 캔자스의 경우 보수화의 중심축은 도덕성이었다.

 

사회학자들이 일컫는 전형적인 미국가정에 속하는 내 친구의 가정을 예로 들어보자...... 친구의 아버지는 공립학교 교사이자 교원노조의 열성조합원이었으며 누구보다 헌신적인 민주당원이었다. 반면, 내 친구는 그때 미국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 윌리엄 버클리의 글에 심취해서 레이건을 연호하던 열성 고등학생 공화당원이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마음이 바뀐 사람은 친구의 아버지였다. 그가 공화당으로 전향한 가장 큰 이유는 낙태 문제였다. 그는 가식적인 남녀평등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광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영웅이 된 극우방송인 빌 오라일리가 교원노조를 미국을 사랑하지 않는 매국노 집단이라고 매도할 때 그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캔자스 주를 떠나 빨간색 미국에 사는 선한 사람들의 특징은 도덕성을 핵심으로 한다.

 

1. 공화당을 지지하는 빨간색 주에 사는 사람들은 겸손하다.

겸손은 조지 부시의 대선운동의 중심 테마였으며 빨간색 미국의 특성을 나타내는 기호였다고 한다. 빨간색 지역에서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나는 평범하다고 선언한다.(pp.34-35)

반면, 파란색 주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매우 멋지고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파란색 주의 미국인들은 빈정거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2. 빨간색 주에 사는 사람들은 경건하다.

이들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신앙심이 두텁다. 규칙을 잘 지키고 전통을 따르며 윤리의식이 투철하다. 반면 해안지역에 사는 자유주의자들은 무질서하고 자유분방하며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개독들과 비교하지 말 것!)

 

3. 빨간색 주에 사는 사람들은 예의바르고 친절하며 유쾌하다.

그들은 신앙심이 깊을지언정 신앙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성직자들도 다른 사람의 견해를 존중하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기에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이들을 편하게 대한다.

 

4. 빨간색 주에 사는 사람들은 애국자.

이들에게 군대를 갔다 오고 국가를 지키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의무이다.

 

5. 빨간색 주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정직하게 일하는 소박한 노동자이지만 파란색 주에 사는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서류나 만지작거리며 농땡이 치는 건방진 사무직들이다.

 

공화당 지역인 빨간 주와 민주당 지역인 파란 주를 비교하는 두 개의 미국론에 따르면, 파란 주의 사람들은 자신이 멋지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고,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자평하고, 속물적인 상류층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빨간 주의 사람들은 겸손하고, 경건하며, 예의바르고 친절하며 유쾌하다고 말합니다. 빨간 주의 사람들은 애국자이기 때문에 군대를 갔다 오고, 언제나 정직하게 일하는 소박한 노동자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이러한 구분법에 따라 미국의 농민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월가에 보복하기 위해 공화당에 투표합니다.

 

 

   

 

8년 전 내가 이 아파트에 이사 왔을 때부터 앞집 사람은 조선일보를 본다. 아마 평생 봐 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은 참 좋은 분이다. 물론, 사람 좋다는 말처럼 무의미한 말도 없다이 맥락에서 내 말의 의미는 선한 사람이란 뜻이다. 사람은 일단 착해야 한다. 똑똑하고 정교한 지성을 갖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최악의 경우는 착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은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진보진영에 이런 인간들 차고 넘친다. 머리는 텅 비어 있으면서 깡다구만 있으면 그건 양아치와 다를 바 없다.

까칠하기만 하면 진보인가? 교장-교감에게 못되게 대들 줄 알면 급진인가?

혼자 있는 교실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놓고선 그걸 자기 복지의 권리쟁취인양 벙어리 냉가슴 앓는 교장의 시선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밀양이 어떻고 청도가 어떻고 하면 씁쓸함 금하기 어렵다. 오직 자기 이해관계에서만 급진적인 그런 자족적 진보가 아이들을 위함어쩌구 하면 욕이 나온다.

 

끝으로, “싸가지 없는 진보는 사회진보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강준만의 말을 인용하며 지루한 글을 맺는다.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새누리당과 그 지지지들이 어리석고, 탐욕스럽고, 사악하기까지 하다고 믿는 한 민주당은 필패하게 되어 있다. 놀라운 사실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대부분이 실제로 그런 시각으로 새누리당과 그 지지자를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분노하게끔 조롱하면서 그걸 풍자나 정당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게 싸가지의 문제요 도덕의 문제라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도 도덕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노선과 법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물론이다. 그러나 중요한 걸 해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정치인과 정치집단(운동집단, 옮긴이)이 도덕적 신망을 잃어 식물화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도덕주의는 내쫓고 도덕은 불러 들여야 한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진보에 해가 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http://jhinju.blog.me/220017965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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