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말한다

물화된 삶, 물화된 교육

리틀윙 2013. 2. 11. 10:57

재작년에 대학원 강의 나갔을 때의 일이다. ‘book review’라는 리포트가 있는데, 내가 정해준 책 가운데 한 권을 선택하여 읽고 소감문을 적는 것이었다. 리포트를 채점하기 위해 하나씩 살펴보던 도중, 내가 예상치 않은 내공이 실린 문장을 만났다. 나는 한국의 대학원 수준이나 생리를 잘 아는 편이다. 보아하니 수강생들은 공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석사라는 스펙을 쌓기 위해서 온 사람들로서 사설학원이나 유치원 원장 같은 분들이나 대학 졸업하고 취직을 못해 집에서 놀기는 뭐하고 해서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군상들이 제출한 리포트에서 다음과 같은 난해한 수사법을 만나니 뜻밖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제일 먼저 만나는 스승인 부모가 벌써부터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아이를 판단한다면, 아이들은 그 잣대에 따라 철저히 물화(物化)되어 것이다.”

 

그런데 몇 분 뒤 다른 리포트에서도 똑같은 문장을 발견하면서 의문이 풀렸다. 둘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것을 베꼈거나 아니면 둘 다 어디서 베낀 것이 분명한데,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위의 문장을 네이버에서 검색하니 아래와 같이 나온다.

 

 

 

 

 

화면 상단에 적힌 내 리포트 등록하고 용돈 벌자!”라는 슬로건이 이 사이트의 성격을 대변해준다.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내 상식으론 이러한 상거래행위는 마약을 사고 파는 것만큼이나 부적절하다. 하긴 이보다 훨씬 어이 없는 사례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방학숙제를 대행해주는 사이트도 있다 한다. 10만원부터 100만원까지 견적대로 만들어 주는데, 학부모는 그걸 아이에게 주고 아이는 개학날 담임선생님에게 제출하고 담임교사는 학교에 제출하여 과제물전시회에 입상작으로 선정하여 시상을 하는 게 우리네 학교의 풍속도이다. 물론 내가 근무하는 시골 학교의 모습이 아니라 강남스타일일 것이다. 대한민국사회에선 초딩부터 대딩까지 모든 게 묻지 마로 통한다. 고스돕 판대기도 아닌 교육의 장에서 그것도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편법을 통한 목적달성을 가르치는 이 막장 천민자본주의의 묻지마 교육현실이야 말로 그 어려운 물화개념의 의미를 잘 설명해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것은 매매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노동력이나 다른 능력도 상품화되어 물적인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조차도 물과 물의 관계와 같이 나타나는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 전반에 만연한 이러한 경향성을 물화(reification)’라 일컬었다.

 

한국사회에서 대학원이란 자체가 물화된 상거래 교육의 전형이다. 학생들은 학문을 연마하러 오는 선비가 아니라 졸업장이라는 교육상품을 구매하러 오는 고객이다. 그러나 내가 이 분들의 향학열을 폄하하거나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치열한 생존각축의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확보하기 위해 비싼 등록금 내고 내 초라한 강의를 듣고자 앉아 있는 분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어떠한 이유나 명분도 내겐 없다. 나 역시도 돈 벌려고 그 자리에 선 만큼 물화에 따른 속물적 근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물화된 관계망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적 가능성은 상존한다. 덜 추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무브먼트(이제부터 가급적 운동이란 말은 안 쓰기로...)는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교수-학습의 관계에서 그 키는 언제나 교수자가 쥐고 있다. 초중고의 수업이든 대학의 강의든 선생인 사람이 재미있고 심도 있는 강의를 통해 학습자들을 사로잡는 만큼 이 세상은 우리가 꿈꾸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바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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