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의식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면 머리가 좋아진다

리틀윙 2013. 1. 25. 11:22

 음악맑시즘에 이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마지막 자양분이 변증법 철학이다.

 

아직도 모든 면에서 많이 부족하지만어느 순간 내가 전에 비해 상당히 똑똑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변증법적 사고가 내면화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로부터 나는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거나 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내뱉곤 한다.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면 머리가 다섯 배 좋아진다!"

 

 

   

 

변증법 하면 흔히 --이라는 삼분법(Triade)을 떠올리건만, 정반합은 변증법과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동전의 양면이니 양날의 칼이니 하는 은유법이 변증법에 가깝다.

변증법이 뭔지를 논하려면 책 한 권을 써야 할 것이다변증법을 가장 간단하고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진리는 전체다 ; Das Wahre ist das Ganze”라는 헤겔의 한 명제만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1) 연관의 맥락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기 :

수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어제 내가 본 영화를 예로 들어 보겠다. 1975년에 만들어진 너무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는 가난한 시골 처녀가 돈 벌어서 사홀어머니와 동생들을 호강시켜주겠다는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가정부로 일자리를 얻었는데 주인집 망나니 아들에게 몸을 버리고 쫓겨나 미싱시다를 거쳐 버스안내양을 하다 사고로 한 쪽 팔을 잃게 돼 마지막에는 몸 파는 여자가 된다는 스토리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며칠 전에 내가 쓴 <작은 새>에 관한 경험이 떠올랐다. 몇 십년 만에 찾아온 한파로 야생동물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학교 건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출구를 못 찾고 헤매다가 결국 기력이 다해 건물 안에서 쓰러져 죽었던 것인데먹이를 구하지 못해 며칠을 굶은 상태로 보였다7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한 쪽 팔을 잃은 영자가 갈 곳은 밤거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변증법적 사고란 현상 그 자체에 렌즈를 고정시키고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적 인과관계를 연관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현상 그 자체로는 영자는 '창녀'일 뿐이다. 우리 교사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를 볼 때 아이의 인성 자체보다는 아이가 일탈적 성향을 갖게 된 가정배경이나 사회적 환경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이 변증법적 사고이다.

 

 

 

    

 

2) 일견 정반대로 보이는 두 측면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기 :

이 또한 1)의 연관의 맥락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다르지 않다.

모든 사물은 서로 대립되는 두 측면을 가지는데 각각의 측면을 극성(polarity)’이라 하고, 짝을 이루는 양 극성의 조합을 범주쌍이라 일컫는다. 헤겔 변증법에서 대표적인 범주쌍은 양과 질’, ‘현상과 본질’, ‘우연과 필연’, ‘부분과 전체’ ‘형식과 내용등인데, 이 외에도 수많은 예를 들 수 있다. 내가 잘 드는 예는 이론과 실천’, ‘삶과 공부’, ‘이성과 감성’, ‘물질과 관념’, ‘주관과 객관’, ‘교육(상부구조)과 하부구조’... 등등에 대한 사고와 아이디어 확장에 힘쓰고 있다.

변증법적 사고란, 대립적인 두 극성을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연관의 맥락에서 생각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전자의 관점을 취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성과 감성의 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이다. 반면, “아는 만큼 보이고, 느끼고 사랑할 수 있다고 깨닫는다면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이다. 심지어 운동권 사람들도 비변증법적인 사고틀을 못 벗어난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운동권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어법으로 “~는 관념적이어서 문제야라거나, “그건 현상이야. 중요한 건 본질이라고라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변증법이 뭔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좀 전에 내가 언급한 식민지적 사고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이다. 내가 이 둘을 연장선상에 배치한 이유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식민지적 사고를 지양(Aufheben)하고 변증법적으로 사고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이다.

 

일과 휴식을 별개의 것으로 서로 상극적이고 대립적인 속성의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것이 변증법적 사고에 대립되는 형이상학적 사고이다. (나는 이걸 식민지적 사고라 일컬었다.)

변증법에서는 서로 대립적인 두 속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적이 일어난다. -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변증법철학의 앙숙 실증주의자들은 변증법을 황당한 사고체계로 치부해버린다. 이에 대한 해명을 하기 위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다. 다음에! -

 

 

교사인 사람은 알 것이다. 아이들이 언제 성장하는지. 물론, 식민지적 사고에 갇혀 있는 센세이들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교사가 아니라 국어기술자, 사회기술자... 들이다. 이런 자들이 돌리는 학교는 공장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천재적인 음악 <Another Brick in the Wall> 참고!

 

 

 

겨울 방학 끝난 뒤에 만난 어떤 아이가 낯설게 느껴질 만큼 성장했다면 그 아이가 방학 때 뭐 했는지를 물어보라. 아마 아이는 일상을 벗어나 어디 먼 곳에 여행을 다녀왔던지 했을 것이다. 학원과 집만을 왔다갔다 하는 다람쥐쳇바퀴 삶에서 절대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방학(vacation)의 어원 ‘vacatio’가 라틴어로 텅 비움이라는 데 착안하여, 방학 때만큼은 사고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색다른 삶의 세계에 휴가를 가게 하자는 뜻의 글을 쓴 적이 있다. http://blog.daum.net/liveas1/6498578

 

 

아메리카인디언들은 급히 말을 달리다가도 한 번씩 멈춰 서서 반드시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너무 급히 달린 나머지 자신의 영혼이 못 따라올 것을 염려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 영문도 모른 채 죽자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기만 했지 언제 멈춰 서서 영혼을 돌아본 적이 있던가? 20분마다 한 명꼴로 자살을 하는 세계 제일의 자살공화국이란 불명예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의 공부도 그러하지만, 직업전선에서의 일도 그러하다. 일의 능률은 휴식에서 온다. 상식적으로도 쉬어야 일을 할 수 있다.

역사상 위대한 발견은 대부분 '휴식 시간'에 이루어졌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도 산책길에서였고 베토벤은 밤길을 거닐다가 <월광소나타>를 작곡했다. 

 

학생이든 노동자든 인간의 그릇은 비울 때 제대로 쓰일 수 있다. 그릇의 존재론은 무엇을 담기 위한 것인데, 담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하는 것이다.

 

일과 휴식, 이 대립적인 두 속성은 화해불가능한 영원한 남남이 아니라 적절한 방법으로 조화를 이룰 때 엄청난 결실로 이어진다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의 심오함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변증법적 범주쌍의 예를 쭉 나열하면서 흥미 있는 철학적 담론을 엮어보려고 한다.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면 머리가 다섯 배 좋아진다. 반대로, 변증법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진리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레닌의 말이지만) 변증법을 모르는 사람은 진보철학의 바이블 <자본>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내가 번역작업 하고 있는 프레네의 교육철학도 그렇다. 프레네는 일과 놀이 work and play’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변증법적 논리를 펼치는데, 프레네의 교육철학은 Dewey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존 듀이의 철학, 피아제나 비고츠키, 콜버그...... 심지어 브루너의 교육이론 또한 변증법을 모르면 제대로 접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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