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실천에 관하여

리틀윙 2012. 1. 22. 02:02

책을 많이 읽는데 왜 실천은 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론 섭렵과 실천 옮김을 따로 따로 생각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사람은 머릿속에 지식을 넣어 깨닫는 만큼 행동으로 옮기는 법이다. 따라서 내 관점으로는 행동하는 양심이란 말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자기 양심대로 행동하는 법이서, 흰색의 양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검은 색의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다. 그 좋은 예가 최근 박원순/정동영에게 테러를 가하고 팝오페라 공연 도중에 빨갱이 타도운운 고함을 지르며 우리를 황당하게 만든 60대 열혈 반공주의자의 행동이다. 이 분이야말로 행동하는 양심의 전형이라 하겠다.

행동하는 양심의 원조(김대중)께서 자신의 정적 김영삼더러 양심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을 것이다. 내 말이 틀렸는지 김영삼 본인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아마 자신은 평생 자기 양심대로 살아왔노라 힘주어 말할 것이다. 3당합당 또한 자기 양심의 발로였노라고 말할 것이다. 그게 김영삼의 양심인데, 그 양심은 그의 무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논리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론과 실천은 함께 나아간다. 지식을 통해 각성한 만큼 양심을 형성하고 또 그 양심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실천을 위해서는 지성의 단련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지적 각성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무면허 의사가 메스를 들어서는 안 되는 이치와도 같다. “나는 이론에는 자신이 없으니 실천만 열심히 하련다는 운동권들이 이 사회의 진보를 망쳐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사람이 살면서 자기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기보다 어떤 시점에서 양심상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데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해방을 위해, 독재정권 때 민주주의 운동에 투신하는 투사들을 보고 그들을 따르지 못하는 자신의 처신을 책망하는 경우가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앎과 행동의 불일치라는 프레임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에겐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훼괴한 논리로 양심과 실천 사이에 놓인 딜레마를 벗어나고자 애썼지만 인간의 삶에서 실존과 본질의 문제를 따로 따로 규정한 자체가 오류이다. 인간 삶에서 실존과 본질이 각각 별개의 문제일 수 없다. 실존적 상황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자세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점령하의 프랑스 레지스탕스 청년이 폭탄을 들고 적에게 달려갈 것인가와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는 어머니의 병 수발을 위한 효도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실존적 문제에서 정답이 없노라고, 실존적 삶의 주체가 자유롭게 선택할 문제라고 대답한 것은 철학자로서 무식한 것은 둘째 치고 얼마나 무책임한 태도인가?

우리 모두의 삶은 사실상 그 레지스탕스 청년과 같은 갈등과 번뇌로 점철되어 오지 않았던가? 독재정권 시절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교단에서 쫓겨날 운명 앞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교사들이 눈물을 머금고 탈퇴했다. 그때 나는 그나마 초임교사였기에 양심의 가책을 덜 받았지만, 함께 교육운동을 하던 많은 선배 교사들은 참교육의 깃발을 지키기 위해 해직을 감수한 선생님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짐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회적 삶 속에서 우리가 맞이하는 선택의 기로는 단순히 선 아니면 악의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인간 삶이 양자택일의 문제로 그친다면,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두 부류 밖에 없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괴리는 좋은 사람은 영원히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영원히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먼저 온 자가 나중 되고 나중 온 자가 먼저 되는경우를 우리는 많이 목격하게 된다. 방금 예로 든 전교조의 활동가 중에서 그런 예를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 혹은 여건에 따라서나 개인적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인간은 실존적 상황에 처한 매순간 치열한 고민과 사색을 통해 인간다운 삶(=본질)을 추구해간다. 반대로, 이런 치열한 고민 없이 관성적인 실천을 하는 한때의 영웅적인 투사들이 현재 후배 활동가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상실한 채 쓸모없는 늙은이취급받는 경우도 많다.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떠올려 보자. 이 시의 주인공은 살아남은 자신이 미워졌다고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용기있는 행보를 가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한, 그의 삶은 필연적으로 ‘행동하는 양심’에 가까울 것이라는 것이 나의 논리이다. 그러므로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삶의 여정은 얼마나 길고도 질긴가? 어느 한 순간의 선택으로 그 사람이 영원히 영웅이 되거나 비겁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극단적인 한계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누구나 자기 위치에서 자기 역량이나 그릇만큼의 실천을 하면 된다. 아니 필연적으로 그렇게 하게 된다. 자기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지적 단련이 필수적이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실천없이 책 많이 읽는 것은 쓸모없다는 망언을 삼가야 한다. 물이 차면 넘치듯, 진지하게 섭렵한 지식은 저절로 실천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반대로 도무지 지적 단련은 게을리 하면서 광장에 나가 팔뚝질만 열심히 해대는 운동은 이 사회의 진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끝으로, 지금 한국사회는 브레히트의 시에 나오는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선택의 문제가 활동가들의 실천에서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로 진입해 있다. 최소한 교육운동 부문에서는 교육노동양아치들의 헌신(?)이 이젠 선행이 아니라 악행으로 치부된다. 옛날 같으면 교육청 관료들과 말로 다투다가 수틀리면 교육청 마당에 농성텐트 치고 드러누우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글쎄,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한 경우 그렇게 해서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대부3>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거기 보면 <대부1>에서 죽은 행동주의자(activist) 성향의 쏘니(마이클의 형)의 아들(앤디 가르시아, 아버지를 닮은 다혈질의 청년으로 묘사된다)이 자기 삼촌 마이클(알 파치노) 앞에서 자기 주먹을 과시하며 내게 일을 달라고 할 때, 마이클이 한 말이 있다.

지금 우리 조직에서 필요한 것은 주먹이 아니라 두뇌라고. 한 명의 전사가 아니라 한 명의 변호사가 필요하다.

조폭들 세계도 이렇게 변해 있다. 하물며 지성인 집단에서......

 

 

 

 

 

 

 

예고) 다음 글에서는 실천의 내포와 외연에 대해 논할 것이다. 대관절 실천이란 뭘 뜻하는가? 그리고 어떤 행위는 실천에 포함되고 어떤 행위는 아닌가? 광장에 나가 팔뚝질 하면 실천이고 그 외의 것은 실천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실천이 현실적으로 사회를 바꾸는데 얼마나 보탬이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