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나의 운동론 -2)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하는가?

리틀윙 2011. 12. 15. 10:21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하는가?

 

대중의 의식 수준만큼 사회의 진보가 이루어진다면, 인간 의식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이치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인간의 의식이 후천적으로 형성될 것임은 당연하다. 태어날 때부터 좌파 혹은 우파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요컨대, 의식은 학습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면 의식의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논리 전개를 위한 편의상 글쓴이가 고안한 이론인데, 학습에는 수동적 학습능동적 학습이 있다. 이 둘은 각각 맑스가 말한 즉자적 계급의식’ ‘대자적 계급의식과 짝을 이룬다.

 

 

 

 

 

우리는 우리가 품고 있는 의식을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우리의 의식이 자발적 선택을 통해 형성한 것이라면, 그 선택의 폭이 넓어야 하고 또 허용적인 분위기 하에서 자유롭게 선택되어야 한다. 그런데,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의식의 메뉴판에 좌파적 선택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개인적 노력으로 급진적 지식체계에 접근하는 것 또한 용인되지 않았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의 형성은 이런 식의 수동적 학습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 의식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이다. 계급사회에서 대부분의 인간 의식은 이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부구조로서의 이 이데올로기는 하부구조인 생산관계의 유지·존속을 위해 복무한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의식은 지배 계급의 의식이다(Marx). (사회적 존재양식이 의식을 규정하는 이치는 필자가 오랫동안 천착해오고 있는 탐구 주제이다. 계급의식과 관련된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치관 이를테면 근면이란 개념이 봉건사회와 자본주의사회에서 완전히 다르다. 교사로서 나는 감기몸살로 불덩어리 같은 몸을 이끌고 겨울날 아침에 추운 교실 문 앞에서 담임교사를 기다리는 학부모와 학생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아프면 병원으로 바로 갈 것이지 감기 걸린 아이가 왜 추위에 벌벌 떨며 복도에서 선생을 기다리며 눈도장 찍으러 오는가? 그렇게 해서라도 학교를 결석하지 않았다는 보증을 받고자 하고 또 개근상이란 그 보증서는 훗날 노동시장에서 성실한 노동자라는 상품 가치를 보증 받을 수 있는 것이다-실업계 여고에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은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학교를 빼먹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은 자본가에게 이로운 것이지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맑스의 명제가 쉽게 이해될 것이다. 비단 이런 가치관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미()에 대한 관념조차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는 것을 필자가 나름 재미있게 엮어봤는데, 관심 있으신 분을 위해 글주소를 안내한다. http://blog.daum.net/liveas1/6498572)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그람시는 시민사회에서는 이 이데올로기의 포섭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한편으로 대중의 광범위한 동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에 주목했다. 이것이 헤게모니인데, 헤게모니는 이데올로기보다 더 폭넓은 개념이다. 이데올로기를 전파함에 있어 지배계급은 동의보다는 강압적 수단에 의존하지만, 헤게모니의 구축에는 강압 외에 동의가 수반되어야 한다. 헤게모니는 시민대중으로 하여금 현재의 사회상황(現狀)이 자연스러운 것, 또는 상식적이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주술적 힘을 갖는다. 박원순시장을 향해 빨갱이 물러나라고외치는 어버이나 희망버스를 향해 폭언을 퍼붓는 가스통 할배들이 지배계급의 사주를 받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고상하게 말해 이들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는 점에서 행동하는 양심인 것이다. 이에 관해 필자가 블로그에 쓴 글 <문제는 양심이 아니라 양식이다>를 참고하기 바란다. http://blog.daum.net/liveas1/6498711

 

 

 

 

그람시는 헤게모니가 궁극적으로 경제적 역량에 바탕한다고 보았다. , 가스통 할배들의 행동하는 양심(?)도 먹고사는 게 어느 정도 해결되었기에 빚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이 분들이 늘 떠드는 단골 메뉴가 젊은 것들 박정희 비판하는데, 박정희 아니었으면 이 나라가 이렇게 살 수 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면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의한 주술의 약발이 바닥나는 것이니, 이게 흔히들 말하는 혁명의 시기이다. 그토록 공고하여 자본주의사회가 천년만년 이어질 줄 알았던 미국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경제력과 헤게모니의 관계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까 경제력이 뒷받침된 헤게모니에 의해 굴러가는 사회가 그람시가 말하는 시민사회인데 한국은 이미 오래 전에 시민사회에 진입해 있다. 그람시는 시민사회에서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대중이 주체가 된 투쟁이 없으면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대중으로 하여금 운동의 중심에 서게 할 것인가? 대중이 자발적으로 나서기만 하면 되는가? 가스통 할배들도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자발적 앙가주망 자체가 사회발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좌파든 우파든, 활동가든 평범한 대중이든 의식의 안받침이 없는 사회적 실천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의식은 수동적 학습이 아닌 능동적 학습을 통해 형성된 대자적 의식이어야 한다. 앞에서 계급사회에서 인간의 의식은 최초에 수동적 학습을 통한 허위의식으로 형성된다고 논했다. 대중으로 하여금 이 허위의식의 껍질을 벗고서 대자적 인식을 갖게 하는 능동적 학습’, 파울루 프레이리가 말하는 의식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의식의 발전이란 허위의식의 껍질을 벗고 대자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대중 스스로 능동적 학습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대자적 의식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활동가는 대중의 의식 발전을 돕는 '유기적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대중과 함께 하는 활동가는 대중을 끌고 가려 해서는 안 된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교선(교육/선전)을 해야 한다. 프레이리의 말을 빌리면, “대중에게(to the people)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with the people) 프락시스해야 하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이의 기본적인 자질은 기다림이어야 한다(신영복). 긴 호흡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 멀리 보고 궁극적으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counter-hegemony) 구축에 힘써야 한다. 절대다수의 대중에게 디비자(뒤집어엎자)!” 라는 정서가 팽배한 혁명의 여명기가 아니라면, 대중의 의식이 저절로 급진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아니,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바뀐 의식은 못 믿는다는 것이 나의 관점이다. 그것은 1917년 무력으로 쟁취한 혁명이 현재까지 어떻게 붕괴되어 오고 있는가 하는 작금의 역사가 말해준다. 결단코 나는 지적 각성이 뒷받침 되지 않는 대중의식을 믿지 않는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욱 하는 마음에서 갈아엎은 판대기는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뒤집어엎은 자가 권력을 쥐면 기존 권력자보다 더 사악한 파쇼를 부린다는 것을 우리가 뼈저리게 겪어오지 않았던가? 힘으로 판대기를 갈아엎는다고 해서 인간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식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소수 엘리트들의 의식 변화가 아니라 범대중적인 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게 진정한 진보다. 극단적으로 말해, 진보란 의식의 진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의식의 안받침 없이 얼떨결에 다가온 진보를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 주체의 의식의 변화만큼 이루어진 진보만을 믿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