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또 다른 관점으로 <소금꽃나무> 읽기

리틀윙 2011. 10. 28. 17:05

이 글은 며칠 전에 올렸던 <소금꽃나무>에 대한 독후감상문의 후속편으로 쓴 글입니다.

 

   모든 사물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두 측면을 가집니다. 진리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사물을 두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내가 예찬했던 <소금꽃나무>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균형잡힌 사고로 접근해보자는 뜻에서 이 글을 써봅니다. 나는 김진숙에 전적으로 공감은 하되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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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꽃나무>와 같은 서적을 접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감성에 매몰된 나머지 노동계급을 신비화하는 태도로부터 거리두기입니다. 나의 경우는 노동계급을 실천 속에서 만나기 전에 책을 통해 먼저 만났습니다. 전태일평전이나 박노해/김미영 따위의 사노맹 소속 작가들이 쓴 노동운동 서적을 읽으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대부분이 전태일 같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전교조 운동을 하면서 만난 노동계급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자의적으로 노동계급에 대한 환상을 품었던 내 잘못도 있지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소시민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노동운동의 현주소나 노동계급의 자화상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전태일 기념일 즈음에 벌어지는 전국노동자대회 같은 행사 마치고 돌아올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나게 되는 붉은 조끼 입은 노동자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같은 실천의 대오에 선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 집회장 뒤편에서 담배 열심히 피워대는 것은 좋은데, 열에 아홉의 ‘노동 전사’들은 담배꽁초를 그냥 땅에 내던집니다. 심지어 길 가는 행인이 보는 데서도 그럽니다. 내 느낌으론 그게 무슨 자랑인 양 그러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즉 ‘너희 소부르주아적 도덕성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듯한 기세인데, 이건 소시적 뒷골목 양아치같은 녀석들이 선량한 애들 앞에서 침 찍찍 뱉는 식으로 ‘타자와 차별화’ 하는 것을 나름의 미덕으로 착각하는 그런 소아병적 행동양식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담배 이야기 나온 김에, ‘진보’ 외치는 사람들의 흡연율이 그렇지 않은 부류보다 엄청나게 높은 점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져봅니다. 도대체 ‘진보’와 흡연 또는 알콜 사이에 무슨 필연적인 연관성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즉, 사회적 고민이 많으니 담배를 많이 피운다거나 제 건강 챙기기에 급급한 소시민적 생활자세에 대한 거부감의 발로가 아닌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우습고도 한심한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이건 진보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진보는 그리 복잡한 사상체계가 아니라 상식 그 자체입니다. 남에게 폐 끼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진보’도 뭐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소금꽃나무’에 심취하여 현실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접합시킬 것인가 하는 고민은 없이, 그저 “노동자는 그 자체로 순결한 계급”이라거나 “민주노총 깃발아래 단결투쟁만이 살 길”이라 외치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데 아무런 도움이 못됩니다. 방금 살펴봤듯이 현실 속의 노동계급은 그리 순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노동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특강에서 그런 식의 멘트가 많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금꽃나무>의 저자 김진숙 지도위원의 강연입니다. 이 책에서도 그렇습니다. 책의 뒷부분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집회장에서 발언한 투쟁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데,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특유의 정서적 화법은 한편으론 감동 그 자체이지만,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볼 때 이건 내가 지금 논하고 있는 ‘노동계급의 자기최면'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소금꽃나무>에 전교조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최소한 전교조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저자보다 더 잘 압니다. 내 ‘나와바리’니까요. 김진숙 지도위원이 뭐라고 말하건 간에, 전교조 조직은 순결과 거리가 멉니다. 다만, 전교조 선생들은 ‘순결’이란 표현은 뭐 하고, ‘순수’하죠. 덧붙여, 그 순수한 전교조 선생들의 대부분은 “노동계급 순결” 운운하는 수사법에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런 소시민적 사고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전교조가 합법화 된지 12년이 돼 가는데 지금까지 언제 조합원들의 의식 고양을 위해 조직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였던 적이 있는가 하면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너무나 간단합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활동가라는 사람들조차도 ‘의식’이란 게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활동가와 일반 조합원의 차이는 의식이나 지적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투쟁!”이라는 구호에 얼마나 익숙해 있는가의 차이 정도가 아닐까요? 이러한 실태는 전교조보다 민주노총, 즉 제조업 노동조합에서 더 심합니다. 그건 진보정당의 현주소가 말해줍니다. 도대체 이 나라에 노동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수많은 노동자 가운데, 선진된 의식을 못 갖추더라도 최소한 투표소에 가서 진보정당후보를 찍는 노동자가 몇 퍼센트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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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내가 “노동계급의 순결성”에 대해 비판적 논조로 말한 것은 현실 속의 노동운동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뜻 외의 불순한 뜻은 없습니다. "노동계급의 순결"을 외치는 것은 좋은데, 그걸 골방에서 소수끼리 맞장구 치며 공유할 것이 아니라 광장에까지 설득력을 펼쳐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운동입니다. 현실성을 담보하지 못한 채 그저 허공에 대고 구호만 부지런히 외치는 것이 현실 개혁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입니다.

    노동이 신성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현대사회에선 노동의 형태가 다양화되어 가고 있다거나, '노동의 종말'이니 하는 개념까지 유포되고 있지만, 힘든 일 하는 사람이 돈은 적게 받는 현실이 존재하는 한, 육체노동이 기피되는 풍조가 청산되지 않는 한 그런 말들은 다 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고 사무자동화 시대라 하지만 컴퓨터를 만드는 것도 노동자고 또 그 핵심 부품인 반도체메모리를, 극도의 위험한 작업환경 속에서 만드는 일도 노동자의 몫으로 매겨져 있습니다. 정보화시대의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노동자의 ‘소금꽃’ 없이 세상이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세상의 주인이고 또 세상을 바꾸는 주역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결국, 답은 맑스가 말한 ‘대자적 노동자’입니다. 술담배 멀리하고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길바닥에 담배꽁초 과감히 내던지는 것이 ‘진보’가 아니라 ‘퇴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량한 소시민들과 친화력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다가가고 또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최근 ‘희망버스’에서 보여준 한진중공업의 투쟁에서 엄청난 희망을 발견합니다. 내가 늘 노동계급의 투쟁이 시민운동과 결합해야 한다고 강변했는데 이것이 그 바람직한 전형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희망버스는 멕시코의 사빠띠스따를 보는 듯한 신선한 충격과 감동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 한진의 투쟁이 김진숙 지도위원이 바라는대로 결실을 맺을 것 같아 기쁩니다. 크레인에서 내려오면 김진숙은 유명인사가 되어 있을 겁니다. 김꽃비와 김여진 같은 영화배우들이 노동자의 정체성을 대변하려 하고 거꾸로 노동자 김진숙은 스타가 되는 그런 세상이 오길 바랍니다. 너무 감상적인지 모르지만, 김진숙은 꿈만 같은 그 무엇을 현실화할 수 있는 역량과 진정성의 화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진숙의 책 <소금꽃나무>가 널리널리 읽히면 그렇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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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왜 그리 오락가락 하느냐 하는 불만을 품으실 분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은 늘 왔다갔다 해야 합니다. 변덕과 변화는 다릅니다. 변화하지 않는 사고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바늘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르르 떨고 있다.

그 가느다란 바늘이 좌우로 떨고 있는 한, 그것은 자기 임무를 망각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신뢰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늘이 떨기를 멈추고 고정된 한 곳만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더이상 나침반이 아닌 것이다. - 신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