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소금꽃나무

리틀윙 2011. 10. 11. 16:16

 

 

 

 

 

 

홀딱 벗기고 군복을 갈아입히더니, 그들은 웃으면서 묻고 답한다. 왜 군복을 갈아입히는지 아냐고. 알몸으로 작업을 하면 기분은 좋은데 살점이 묻어나 나중에 거추장스러워지노라고. 알갱이가 터져 껍질에 즙이 배어 나오도록 매질을 해도, 그 상태로 거꾸로 매달아 놓아 눈으로 즙이 흘러내려도 알리바이가 안 나오는 거다. 나도 답답했다. 한 조직만 불면, 한 사람만 불어 주면, 이 죽을 고생이 끝난다는데, 살려 준다는데! 아무리 머릿속 구석구석을 후후 불어 봐도 조직도 선도 없는 것이다.

다 나가고 인상좋게 생긴 사람이 혼자 들어온다. ...... 어차피 증거가 다 있고 버텨 봐야 김진숙 씨만 다칩니다. 저 사람들은 인정사정없습니다. 여기 와서 버틴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치고 나오냐 안 다치고 나오냐의 차이지. 사람이 현명해야지. 김진숙 씨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눈빛들, 스무 개 가까이 되는 눈들은 각자 다른 눈이었지만 같은 빛깔로 번득이고 있었다. ... 그들은 또한 씨발년과 김진숙 씨의 절묘한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지옥과 천당의 차이를.

씨발년이었던 어느 지점에서인가 오줌을 쌌다. 이 씨발년, 드럽게 오줌을 싸고 지랄이고, 재수없는 년, 골고루 지랄벵하네. XX를 확 잡아 째뿔라. 어디 뺄개이 년은 XX도 빨간가 함 보자. 내가 오줌을 쌌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엔 껌도 씹었고, 자기 딸 얘기도 했고,...... 그들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그 몸서리처지는 사실이,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온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절망이었다.

 

다시 돌아온 세상은 너무나 아무 일이 없어 보였다. 길에서 내려다보이던 주인집 울타리엔 목련꽃이 지고 새잎이 돋아나고, 그게 참 서러웠다.

.... 잠이 들면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에 주인 할머니가 달려오셨다. 할머니 고향 사람이 정신 놓을 때 꼭 그러더라며 닭을 삶아 주시기도 했다. 삶아 놓은 닭을 보며 이 닭은 죽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들은 정말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처럼 처절한 가책 끝에 자살이라도 했을까. 국민의 대표로 국회에도 들어가고 정부 요직에도 들어가고 언론에도 들어갈 만치 그들은 개과천선을 한 걸까. 그들이 반성하는 말이나 사죄하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누가 그들을 용서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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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내용이 너무 칙칙하죠?

나도 이런 글 올리기가 뭐 합니다. 내가 쓴 글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상상력이 그려낸 창작소설도 아닙니다. 어느 한 노동자가 몸소 겪은 일입니다. 내 입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확신과 작은 양심 그리고 현실에 관한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저 글이 과연 얼마나 진실을 담고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해 전에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본 대학생 조카 녀석이 80년 광주에 대한 영화의 사실성에 의문을 품어 오던데, 윗글에 대한 의구심 또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온 ‘국가’나 국가기구에 대한 보편적인 관념에 비추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윗글 내용이 백프로 사실이라고 확신합니다. 20대 내 조카와는 달리 ‘고문공화국’으로 상징되는 8-90년대의 한국현대사를 치열하게 살아온 생활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 역시도 저런 끔찍한 경험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을 직간접적으로 한 주위 분들의 이야기나 여러 서적과 다큐물을 통해 알게 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그 시대의 고문기술자들은 한 여성 노동운동가에게 저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위의 진술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입증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정부가 의지만 있으면 고문기술자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그들을 소환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렇게 안 할 겁니다. 자기 똘마니들을 보호하려는 무슨 조폭식 의리의 차원이 아니라, 그 ‘비인간’의 책임에 정점에 있는 자들이 현재 사회지도층에서 버젓이 살고 있기 때문이죠. 인권변호사로서 김진숙씨의 동료들을 변호했던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도 그렇게 못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이게 내가 힘주어 말하고 싶은 ‘현실’입니다.

김진숙이 도둑질해서 공안당국에 끌려가 저런 고초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나눔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바로잡자는 주장을 힘 있게 펼친 죄입니다. 그리고 그 나눔의 부조리와 그 부당성을 외치는 자에 대한 억압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그것은 지금 김진숙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 하는 것이 말해줍니다. 김진숙은 지금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 중입니다. 300일이 다 돼간다고 하는데 말이 300일이지, 초가을이긴 해도 그 높은 곳은 초겨울의 기온일텐데,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씻지도 못한 상태에서 추위에 떨면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300일씩이나 고공 농성을 벌이는 것은 무슨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극단적인 용기의 원천은 첫째가 윗글에서처럼 소시민들의 사고로는 과연 사실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처절한 비인간적 만행을 몸소 격었기 때문이겠죠. 아무리 추워도 크레인 상공에서 발가벗긴채로 거꾸로 매달려 있지는 않을 것이고 또 키득거리며 그걸 훔쳐보는 악마들의 시선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둘째는 그런 극한의 삶을 살아온 김진숙에게 부채의식을 떠안긴 동지들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일 겁니다. <소금꽃나무> 속에서 김진숙 주위에는 ‘죽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교통사고나 불치의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나눔의 부조리’가 빚은 생활고를 못견디거나(배달호열사), ‘나눔의 정의’를 외치며 산화해간 투사들입니다. 그 중 일부는 지금 김진숙이 머물고 있는 그 크레인에서 목을 매거나(김주익) 뛰어내려(곽재규) 자진한 분들입니다. 김진숙이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결코 내려오지 않는 뜻은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그 숭고한 정신을 잇고자 함입니다.

셋째, 먼저 간 사람에 대한 빚도 빚이지만 살아남은 사람이라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일 겁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의 박창수와 김주익 그리고 곽재규를 안 만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한진 회장은 순전히 ‘자본의 논리’에만 충실해 350여명의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통첩했습니다. 정리해고는 노동자에게 죽음과도 같습니다. 노동자 한 몸만이 아니라 그의 월급봉투에 의지해 사는 일가족의 몰살을 의미하죠. 그래서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이래 죽어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이기에 극단적인 투쟁의 형태를 취하는 겁니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국가 전복을 기도한 불순분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하루의 힘든 노동을 뒤로 하고 가정으로 향할 때 “아빠” 하며 반겨주는 자식새끼들과 마누라에게 등따습고 배불리 먹여주는 그 일상을 누리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소박한 행복을 나 혼자가 아니라 자신처럼 등에 소금꽃 만발한 작업복 입고 열심히 일 하는 동료들과 함께 나누려는 정직한 노동자들의 소망인 것입니다.

 

많은 열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마침내 세상은 김진숙의 나홀로 투쟁에 화답을 하고 있습니다.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김진숙을 살리고 또 그의 동료들을 절망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부산의 영도다리로 향할 때, 대한민국의 경찰들은 김진숙을 안으려는 그들의 따뜻한 연대의 손길을 차가운 방패와 바리케이트로 막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시도에 최루액을 응사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서 이들을 폭도로 몰아가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인 테러를 가합니다. 자유민주주의국가인데, 왜 그 잘난 ‘자유’가 김진숙과 노동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걸까요? 자본가에겐 이들의 밥줄을 멋대로 자를 자유를 주고 또 그에 항거하는 노동자와 그들을 돕는 ‘외부세력’들로부터 경찰병력을 제공해줘 지켜주면서 왜 이들에겐 절망 속에서 결국 목숨을 끊을 ‘자유’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나는 TV 프로 가운데 드라마나 예능프로를 잘 보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즐기시는 분들 가운데 극중에서 우리의 주인공이 부도덕한 권력으로부터 부당한 피해를 입고 실의에 빠져 눈물을 흘리거나 할 때, 동병상련의 마음에서 같이 마음 아파하고 나아가 그 악한을 향해 적개심을 품지 않는 사람 잘 없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나눔의 부조리’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이웃에 대해서는 무심한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사라면 이건 뭔가 앞뒤 맞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서 그러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신조어나 ‘88만원세대’로 상징되는 우리 시대 모든 시민들의 일입니다. 우리의 일이고 우리 자식들의 미래가 걸린 문제입니다. ‘노동과 자본’의 모순, ‘나눔의 부조리’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김진숙의 운명은 우리 모두의 운명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김진숙과 소금꽃나무에 관심을 가집시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돈보다는 사람이 우대받는 사회를 만들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