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비지론에 관하여

리틀윙 2010. 6. 12. 08:45

제가 자주 찾는 어느 카페에 '변증법에 관한 글'을 올렸더니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양자택일이 아닌 변증법적 관점에서 비지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래의 글은 그 같은 물음에 대한 답글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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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선거에서 노회찬 후보가 양보를 했더라면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을텐데 하면서 진보신당을 비난하는 입장들이 바로 ‘비지론’입니다. 이 용어가 생소한 분들을 위해, ‘비지론’에 관해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비지론은 원래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졌던 지긋지긋한 군사독재를 종결짓기 위해 전두환의 후계자였던 노태우와의 경쟁에서 야당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서는 진보진영이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 것이 아니라 야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논리(=비지론)”였습니다. 내친 김에 한국사회의 진보 운동판의 지형에 관해 약술하겠습니다. 주신 물음인 ‘비지론’과 관련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진보진영 내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간단히, 두 부류로 나누자면 이른바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주의)인데, 개인적으로 두 부류 모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NL은 보수적 입장, PD는 진보(진보라기보다는 ‘무모한 급진’)에 해당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NL이 진보 운동을 이끌어왔고 또 '죽산 조봉암' 이후 명실상부한 최초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또한 이들이 주도해왔습니다. 그런데, 소수파 PD 그룹이 이들의 구태의연한 행태를 더 이상 참지 못해 분리를 선언하고 새로운 당을 만든 것이 진보신당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남아 있는 민주노동당은 모두 NL밖에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북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북한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북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른바 ‘주사파’들이 이 그룹을 이끄는 핵심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민족의 지상과제인 통일을 추구하시는 분들이 꼴통 주사파 리더들에게 휘둘려온 점입니다.


진보신당은 기본적으로 PD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이들 내부의 스펙트럼은 NL에 비해 훨씬 다양하며 자기비판적인 성향들이 강합니다. ‘자기비판적’이라는 것은 NL의 속성인 ‘위에서 시키는대로 무조건 맹종하는 것’과 상반된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NL과 달리 이들의 리더들은 기존 노동운동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보다는 현재 한국사회의 담론을 주도하는 지식인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진중권씨죠. 그리고 전남대 철학과 교수인 김상봉씨도 아주 괜찮은 분입니다. 김상봉씨는 최근 심상정의 후보탈퇴를 놓고 매우 비판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저는 ‘진보신당’에 기대를 많이 겁니다. 비록 지금은 미약하지만, 한국정치의 희망이 이들에게 있다고 저는 봅니다.


이러한 두 부류 외에 현재의 한국사회에는 참여연대를 주축으로 한 ‘시민집단’이 강력히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들 집단은 ‘노사모’로 대변되는 바, 고 노무현대통령이 이 시민집단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의 결집된 힘이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노무현의 말이 이들 집단의 성격과 의의 그리고 가능성을 웅변적으로 설명해줍니다. 이들은 정치조직이 아닌 시민단체에 불과하지만 촛불시위에서 보듯 언제든지 광범위한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 수 있기 때문에 존재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보다 더욱 위력적이다 하겠습니다. 이 글의 주제인 '비지론'이 바로 이들과 관계 있습니다. 즉, 80년대 말 맨 처음 생겨났을 때는 '비지론'을 진보진영이 이끌었지만, 현재에는 이 시민단체들이 비지론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지론’은 처음에는 선거로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적 방안으로 진보진영 내부의 합의를 통해 도출된 것인데, 현재에는 타겟이 ‘한나라당’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비판적 지지’에서 ‘지지’란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뜻하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지론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민주당(국민참여당 포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이 되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일궈내기 위해 ‘민주당’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지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비지론’이란 논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정당이 있다면 “비판적으로” 지지할 것이 아니라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약 민주당이 그러한 대안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면, ‘비지론’이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물론 그럼에도 한때 이것이 설득력을 가졌던 것은, 독재정권이란 괴물이, 절대 다수의 국민대중에게 말하자면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정권 또한 그 파쇼적 성격이 전두환/박정희 못지않다는 정서가 팽배해 있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비지론’이 다시 대두된 것인데, 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비지론’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습니다.


첫째, 시대적 상황이 1987년 대선 때와 지금은 많이 변했습니다. 비지론 지지자들은, 현정권이 밀어붙이는 일련의 파쇼적 공세를 접하면서 역사가 과거 군사독재시절로 회귀했으므로 온 민주세력이 합심하여 한나라당과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역사는 뒤로 돌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촛불에서 보듯이 박정희-전두환 때와 비교해 현재 우리 민중은 엄청나게 성장해 있습니다. 파쇼적 억압이 도가 지나치면 제 2, 제 3의 촛불이 일 것이고 어쩌면 현정권은 임기를 다 못 채우고 무너질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다면, 그 중요한 이유가 다름 아닌 ‘비지론’과 같은 망상 때문이라고 나는 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덧붙이겠습니다.


둘째, 예나 지금이나 민주당은 부르주아 정당입니다. 다시 말해, 절대 다수의 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의 이건희 씨 같은 소수의 재벌들의 이해관계를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정당이라는 겁니다. 기실, 이 나라는 재벌공화국이나 다름 없습니다. 삼성과 현대를 위한 공화국이죠. 삼성의 군주와 그 황태자가 몇 년 동안 재산을 무려 1천배로 불리는 마술쇼를 펼쳐도 그것을 폭로한 내부자의 말에는 검찰이나 언론이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이건희 씨와 그 일족들은 종신형에 처해졌어야 합니다. 같은 자본주의사회라도 미국에서 탈세는 중죄에 해당하죠. 인간 백정 알 카포네가 알카트라츠 감옥으로 보내진 것은 ‘살인죄’가 아니라 ‘탈세죄’로 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 재벌들은 중죄를 저질러도 휠체어 준비해서 환자인 척만 하면 감옥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정권이 노무현의 민주당이었습니다.


셋째, 한나라당이 수구꼴통의 틀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은 사실상 그 반대편에 있는 민주당의 잘못이 큽니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변증법의 기본 테제라 했죠. 만약 민주당이 깨끗하고 ; 서민지향적이고 ; 올곧은 정당이라면, 한나라당은 진작 체질 개선을 했을 겁니다. 그렇게 안 하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내용에 있어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현상유지를 해온 겁니다. 만약 한 동네에서 점빵이 두 군데 있는데 한 군데에선 늘 신선한 물건을 싼 가격에 팔고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면 후자는 망하겠죠. 그런데 둘 다 별반 차이가 없으니까 소비자만 불행해질 뿐 양쪽 다 조금도 자기 혁신을 꾀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를 통해서는 한나라당이 뼈저린 자기반성을 하고 향후 어떤 식으로든 체질 개선을 하리라 봅니다. 그럴 경우, 민주당과 별반 차이가 없어질 겁니다.

나는, 적어도 우리가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보수꼴통으로서의 한나라당은 이제 생명이 다한 것으로 봅니다. “젊은이가 투표하지 않기를 바라는 정당에 미래가 있는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다름 아닌 한나라당 내부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사실이 이 같은 논리를 뒷받침해줍니다. 나는 한나라당 내의 그러한 소장파 의원과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 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나는 다음 대선에서 어느 당이 집권하더라도 멀리 바라볼 때 한국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현단계에서 한국정치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진보정당이 성장해야 합니다. 때문에 다음 대선에서 중요한 관건은 진보정당이 몇 퍼센트의 지지를 받는가 하는 점입니다. 확신컨대, 진보정당의 성장만큼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동반해서 변신을 꾀할 겁니다. 또한, 진보정당이 부쩍 성장해 있을 무렵,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합친 형태로 보수대연합을 이루는 날이 올 겁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제법 살 맛 나는 세상이 되어 있을 겁니다. 언제나 미래를 낙관하는 것, 이것이 변증법입니다.



정리하면, 비지론은 출발부터가 적극적인 대안 또는 분명한 아젠다가 아닌 네거티브 전략이 전부였기 때문에 분명한 한계를 갖습니다. 비지론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어떤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저, 독재권력 청산이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한 순간에만 유효했던 것으로서 지금 또는 향후 몇 년 내에는 생명력이 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야구 경기로 말하자면, 원 포인트 릴리프이지, 선발투수는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미래를 꿈꾼다면 그 대안으로 선발투수를 키워야 합니다. ‘비지론’이라는 근시안적 망상이 선거 때마다 선량한 민중들의 표심을 포섭하는 한, 이 나라 정치의 진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못 나아갑니다. 진보정당이 진정한 대안임을 알지만 그 힘이 너무나 미약한 까닭에 당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대안이 아닌 줄 뻔히 아는 정당에 힘을 몰아준다면, 도대체 ‘진보’라는 어린 나무는 성장할 기회를 늘 박탈당하는 격이 됩니다. 이런 식이라면, 100년 뒤에도 이 사회는 ‘재벌공화국’이란 옷을 못 벗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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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물음이 “양자택일이 아닌 변증법적 관점에서 비지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맥락에서 지루한 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무릇, 모든 사물은 ‘긍정과 부정’ 그리고 ‘현상과 본질’이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만 집착하면(이러한 사고가 ‘형이상학’입니다) 반드시 오류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맑스는 “만약 현상과 본질이 일치하면 어떠한 과학도 필요치 않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현상과 본질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사고와 토론이 필요한 것입니다. 비지론과 관련하여서도 제가 강조했던 점이, “민주당이 본질적으로(=본질) 과연 뭔가” 하는 점을 염두에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비지론을 마냥 거부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이 역기능적 측면과 함께 일정 부분 이 사회를 발전시켜온 순기능적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여대야소의 기존 정국에서 MB 독재타도라는 공통의 이슈로 뭉치지 않았다면 이번 선거에서 범야권연대의 승리는 불가능했겠죠. 그러나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진보정치’라는 어린 나무를 키워야 합니다. 나무는 한 방에 크는 것이 아니라 양적 성장에 바탕한 질적 발전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지금부터 거름을 주고 물을 뿌려주며 준비해야 하는데, 늘 결정적 순간에 ‘형아’가 ‘비지론’이란 논리로 어린 동생이 섭취할 자양분을 빼앗아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둘 사이엔 별 혈연적 공통성이 없건만 형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형제'임을 내세우고 동생은 이웃 사람들 눈치 봐가며 마지 못해 형을 따르는 형국입니다. 어린 나무는 언제쯤이면 자기 나름의 성장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어떠한 경우에도 고정된(불변하는 = 형이상학적) 답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특정 시기의 물적 조건(=객관)과 주체의 역량(=주관)에 따라 구체적으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비판적 지지'와 '진보정당의 성장', 이 양날의 칼은 다음 대선에서 다시 대두되겠죠. 그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무책임한 말이 될지언정, 저는 어떠한 선택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역사는 항상 발전할 만큼, 즉 민중의 역량만큼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적은 오직 '정치적 무관심'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