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한계상황에서 이 문구를, ‘애타는 인내심’

리틀윙 2012. 3. 10. 13:33

 

어떤 악덕 사립학교에 근무하는 한 전교조 선생님을 위해 이 글을 쓰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중등학교의 과반수가 사립학교입니다. 저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사립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교사가 되어 전교조 운동을 하면서 한국의 사립학교가 어떤 곳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립학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대부분의 사립학교는 사실상 교육기관이 아니라 재단의 왕국입니다. 법적으로 재단이사장이 학교의 소유주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사립학교는 사기업이나 마찬가지이고 이사장은 절대군주로서 일반 회사원들이 말하는 오너딱 그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이 점을 잘 모르시는데, 사립학교 교육예산의 95%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됩니다특히 예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건비는 100퍼센트 정부에서 지원 받습니다. 그럼에도 이사장이란 사람들은 마치 교사 월급을 자기가 주는 것처럼 자기 머슴 대하듯 교사를 부립니다. 무릇 교육이란 주로 소신과 철학의 문제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립학교든 공립학교든 교육공공성의 원칙이 지켜지려면 교사가 누구의 눈치 안 보며 자기 소신대로 교육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사립학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립학교에서는 만약 학교장이 비리를 저지를 때 그것을 고발하는 교사는 하등의 불이익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립학교 교사는 재단의 비리에 대해 민감하면 안 됩니다. 자기 철학과 소신대로 행동하면 곤란해 집니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법이어서, 파쇼적인 이사장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에서 교육이 바르게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자는 모든 교사에게 ‘YES’만을 강요합니다. ‘NO’라고 말하는 교사(이하, NO교사)에겐 이런저런 방법을 써서 저항의 싹을 잘라버립니다.

재단이 NO교사에게 가하는 가장 가혹한 형벌은 사회적 고립입니다. 심정적으로 NO교사의 행보를 지지하는 동료교사들이라도 그에게 다가가는 것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둡니다. 퇴근 후 NO교사와 식당에서 밥을 같이 먹거나 술을 한잔 했다가는 학년말에 자신이 원치 않은 보직으로 좌천된다거나 하는 결과가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NO교사는 모두로부터 기피 대상이 됩니다. 쉽게 말해 왕따가 되는 것입니다. 동료교사들은 무탈한 교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NO교사를 왕따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육계에서 학교폭력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건만, 교사가 교사를 왕따시키는 교육의 장에서 어찌 학생을 상대로 한 폭력예방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씁쓸해집니다.

 

그 다음으로 NO교사를 길들이는 현실적인 방법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약간의 결함이라도 찾아낸 다음 그것을 침소봉대하여 올가미를 씌우는 것입니다. 재단 편에 선 구사대 교사가 시비를 걸어와도 NO교사는 참아야 합니다. 그로부터 주먹이 날아와도 같이 실력행사를 하게 되면 폭력교사의 불명예는 NO교사가 짊어지게 됩니다. 특히 학생을 대함에 있어 NO교사는 약간이라도 실수를 범해선 안됩니다. 다른 교사는 더 큰 잘못을 저질러도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NO교사에겐 치명적인 잘못이 됩니다. 포항의 한 사립학교 예를 들면, 자기 자녀에게 시험지를 유출한 교사는 견책을 받은 반면, 시험지 문항에 학교장의 이름을 거론했던 어떤 NO교사는 해임이 되어 현재까지 교단에 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폴 뉴먼 주연의 감옥 영화 <Cool Hand Luke> 한 장면

교도소장: 아직도 네 잘못을 모르겠느냐, 루크?

루크 : 네 소장님. 전 잘못한 것 없습니다. 제발 더 이상 때리지만 마십시오.

 

 

나의 벗 NO선생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선생님에게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까 생각하다가...

제 전공 파울루 프레이리 Faulo Freire의 책에서 읽은 “Impatient Patience”란 개념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에게 유용한 가르침입니다.

뭔가 바꿔야 하는데, 저항을 해야 하는데, 내 처한 존재조건상 그렇게 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에 봉착했을 때 이 문구를 기억합시다.

 

참을 수 없는 참을성

형식논리로는 모순되는 명제인데, 진보철학에서 변증법적 모순으로 일컫 것으로서, 저는 애타는 인내심이라 번역했습니다.

 

impatience(참지 않기)만 고집하면 부러집니다. patience가 뒷받침 되지 않은 용맹정진의 끝은 모든 걸 접고 떠나는 겁니다.

반대로, patience만을 쫓으면 맛이 가는 거죠. 노예의 삶입니다.

 

그래서 참지 않으면서 참아내는지혜와 인내의 자세만이 해결책이라 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때론 스스로를 개조할 필요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 학교에 처음 와서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학교는 엉망인데 선생님들은 배구에는 목숨을 거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절대 다수가 즐기는 무엇이라면 그것을 문화로 인정하며 나를 그것에 맞출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저의 이 경험과 실천의 질감은 선생님의 경우에 비하면 많은 차이가 있을 겁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 내 소신과 철학을 펼치기 위해서는 대중을 등에 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영복의 화두를 빌리면, ‘더불어 숲입니다.

악덕 재단의 책동에 의해 선생님께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고립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덜 비열하고 덜 불선한 교사가 있을 겁니다. 힘드시겠지만 긴 호흡으로 진정성을 갖고서 대한다면 언젠가 그 분들도 우리 편이 돼 줄 겁니다. 최소한 우리를 몰아내는데 앞장서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교사에게 가장 힘입는 더불어숲은 교사와 학부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로서 우리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이미 잘 하고 계시겠습니다만, 아이들에게 유능하고 괜찮은 선생님이라는 믿음이 굳어지면 재단에서도 그런 교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모든 것이 제 실천 범주를 떠난 문제기에 그저 창백한 원론적인 이야기로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참조체계로만 삼으시되 혹 언젠가 저의 이 외람된 조언이 선생님의 실천 속에서 생생하게 부합되어 가치를 발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드려봅니다.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