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전교조칠곡지회선생님들께.
이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요즘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으시죠? 열대야 때문이기도 하지만 올림픽 경기 시청하느라 밤잠을 설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축구 팀의 선전에 환호하고, 박태환이 금메달을 놓친 결과를 두고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데 이렇듯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은 왜 일까요? 이 달의 편지는 스포츠에 관한 이야기로 엮어 봅니다.
지난 25(수)에 학교스포츠클럽 축구 리그전 마지막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칠곡군에서 6개 초등팀이 참가하여 총 다섯 차례의 경기를 펼치는데, 그 간의 우리 학교팀 성적은 4전 전패였습니다. 첫 날 경기에서 5대0으로 참패한 뒤로 저도 아이들도 충격을 받아 다음 날부터 아침 일찍 와서 훈련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저는 학교 출근을 일찍 하는 편인데 아이들은 7시가 되기도 전에 학교 운동장에 진 치고 앉아 저 오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비가 오는 날에도 유치원 건물 처마 밑에서 축구복 차림으로 저를 기다리는 장면입니다.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에 몰입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뙤약볕 아래에서 무모하리만큼 열심히 공을 차며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예전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게 아이들의 생명력이고 교육의 가능성입니다. 교육청에서 왜 하필 이 불볕더위에 그런 행사를 추진하는가 하는 불만이 끓어오르지만, 축구를 매개로 모처럼 행복해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릇된 행정에 대한 분노보다 교육적 순기능적 측면에 무게중심을 두며 교육자로서 보람을 생각하려 애썼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7월에 축구리그전을 연 것은 6월말에 있었던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 때문이었습니다.)
열심히 연습을 해서인지 그 다음 경기부터 점차 성적이 나아지긴 하는데, 점수차를 줄일 뿐 한 번도 이기질 못하고 연전연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마지막 게임,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무더운 날, 극적으로 1승을 챙겼답니다. 1대0으로 지고 있다가 2대1로 역전승했습니다. 경기 운도 많이 따라줬지만 이상하게도 이 날 우리 아이들의 눈빛이 예전과 달랐고 볼에 대한 집착력도 굉장히 적극적이어서 뭔가 좋은 결과가 나오겠다 싶었는데 기대대로 됐습니다.
불볕더위였지만, 그토록 바라던 승리의 기쁨으로 더위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기쁜 소식을 학교 선생님들과 나누기 위해 그룹 문자를 날리니 답장이 계속 날아옵니다. 더구나 그 날은 종업식을 하고 행복한 기운이 충만해 있을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생긴 것도 빵이 생긴 것도 아닌데 왜 아이들도 교사들도 교장선생님도 학부모도 모두들 기뻐할까요? 물질적 이익과 거리 먼 가치를 매개로 모두가 하나 되어 기뻐하는 이 원초적 감정의 승화, 실로 스포츠가 갖는 교육적 가치도 이게 전부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점수(승진점수, 학교경영평가 점수)’ 따위가 개입되는 순간 스포츠의 숭고미는 추하디 추한 짓거리로 전락하는 바,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alienation)’입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소외된 스포츠교육의 전형이 육상대회입니다. 여기서 학생과 교사, 교사와 학교장, 학교장과 교육장, 교육장과 교육감은 오로지 ‘점수’로만 말을 합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관계)은 없고 따라서 ‘교육’도 없습니다. 이건 일종의 ‘상거래 행위’입니다. 그 속에서 아이는 상품으로 오고 갑니다. 우리 학교엔 군을 대표하는 육상 유망주가 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뙤약볕에서 매일 기계처럼 반복되는 육상훈련에 질려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체육계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매일 애들을 태워 훈련장으로 데려 갑니다. 적나라하게 말해 도살장에 소 끌고 가는 기분입니다.
육상부 두 아이에 비해 돈(?)도 안 되고 내 노력도 몇 곱절이나 더 들지만 이 스포츠클럽 축구대회에서 교육자로서의 보람과 희열을 맛봅니다. 경기 끝나고 시상식을 하였습니다. 우리 학교는 꼴찌입니다. 그러나 학교교육 영역에서 치러지는 대회에서 꼴찌를 하고서도 이렇게 환한 웃음을 짓는 경우를 처음 봅니다. 대회장에서 만난 교육장님에게도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마침 며칠 전 교육장실에서 교사연수 문제로 지회장이 돼서 불편한 목소리를 내고 했던 터라 내빈석으로 다다가 인사를 건네니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나 : 교육장님께서 좋은 교육사업을 펼쳐 주셔서 우리 몸은 고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니 교사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교육장 :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봐 걱정이네요.
나 :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아무리 더워도 애들 입장에선 축구를 안 시켜줄까봐 걱정이지,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하면서 쓰러지는 아이는 없습니다. 그게 아이입니다!
........
모든 사물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집니다.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 순기능과 역기능, 긍정과 부정. 그런데 이 두 측면은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 아이러니한 변증법의 이치를 다름 아닌 올림픽에서 실감나게 목도합니다. 승자의 환호 뒤에 패자의 쓰라린 비애가 있습니다. 수영 영웅 박태환을 만들기까지 그를 위해 들러리를 썼던 무수히 많은 수영 꿈나무들의 좌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올림픽이 시작되는 날 전 국민의 관심이 수영경기에 모아져 있는 틈을 타 만도 파업현장에 용역깡패들이 동원되어 노동자들을 짓밟아 피 흘리게 했습니다.
무릇, 사물은 항상 두 가지 측면을 가집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 이면에 숨겨진 것을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끝이 설교 투의 말로 흘렀네요. 죄송합니다.
무더운 여름 잘 나시고 남은 방학 즐겁고 보람있는 나날 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12년 7월의 마지막 날,
전교조 칠곡 지회장 이성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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