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운동

나의 운동론 (3/3)

리틀윙 2012. 4. 15. 23:01

  <나의 운동론>이란 제목으로 지난 12월에 두 번째 꼭지의 글을 쓰고 오랜 기간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은 지금 올리는 그 후속편의 이 글도 그 때 90퍼센트 정도 작업이 되어 있었지만 결론짓기가 어려워서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총선 결과로 인해 진보 진영 전체에 퍼져 있는 무기력과 실망감을 접하면서 다시 이 글을 마무리해서 올릴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진보의 기관차가 굴러가는 원리

 

 

지난 글의 말미에서 진보란 의식의 진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의식의 안받침 없이 얼떨결에 다가온 진보를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의식의 분포는 아래와 같이 좌파적 의식과 우파적 의식이 편재된 정상분포곡선을 이룬다. 사회의 진보란 이 곡선이 왼쪽으로 옮아가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진전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며, 개인이 저절로 무엇을 깨달아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문화)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나의 논리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보는 곧 의식의 진보이다.

 

 

 

 

 위의 정상분포곡선을 기관차에 비유해보자. 이 기관차는 1등급에서 9등급까지의 9개의 화물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화물 칸은 나름의 추진 동력을 갖고 있는데 이 동력 지수의 총합만큼 사회가 진보한다. 편의상 가운데 5등급을 중심으로 왼쪽은 (+) 오른쪽은 (-)를 나타낸다고 칠 때 좌파 지수의 총합이 10이고 우파 지수의 총합이 -8이라면 사회는 2만큼 진보하는 것이다. 좌측 열차 칸은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작용action) 우측 열차 칸은 멈추려 하거나 심지어 뒤로 가려 한다(reaction 반작용 또는 반동: 후자의 속성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을 1편에서 논했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요동치면서 발전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기관차는 뒤로 가는 법이 없다. 항상 앞으로 나아간다. 설령 뒤로 가더라도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이며 향후 더 큰 걸음을 내딛기 위한 움츠림으로 봐야 한다. 멀리 도약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는 개구리의 몸짓을 퇴행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지적 발달이 그러하듯 진정한 의식의 성장은 구성적으로이루어진다. 외적 강제나 주입에 의해서 획득된 수동적 의식은 진보와 아무 관계가 없다. 80년대 학생운동 써클에서 흔히 그랬듯이, 대자적 실천과 학습을 통해 주체적으로구성한 의식이 아닌, 권위 있는 주변 인물(주로 써클 선배)에 의해 주형된의식은 진보적 의식이 아니다. 사실 지금껏 우리 운동판을 망쳐온 사람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개인의 의식 발전이 구성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에서 대중의 의식 발달에 대해 비고츠키의 인지 발달 이론을 원용할 수 있을 것이다. 비고츠키 인지이론의 핵심은 사회적 구성주의로 요약되는 바, 개인의 인지능력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해간다는 것이다. 또한 의식의 성장에서도 근접발달영역(ZPD) 개념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근접발달영역은 현재의 발달수준과 잠재적 발달수준 사이의 간극을 의미하는데, 이 간극이 너무 크면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은 보다 나은 발달단계에 있는 주변인의 도움으로 한 단계씩 순차적으로 성장해갈 수 있다. 이를테면, 극우 스펙트럼 즉, 9등급의 꼴통 학생을 바로 1등급으로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9등급의 학생에게는 7~8등급 수준의 의식화를 목표치로 삼아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총체적 의식 수준의 스펙트럼은 이를테면 어버이연합 수준, 새마을운동본부 수준,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의 순서로 편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인해 9등급 무리 가운데 어떤 사람의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자기 활동 영역 내에서 파장을 일으켜 집단의식의 변화에 혁신을 꾀하는 운동가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변하는 사람의 수만큼 사회의 변화가 촉진되는데 이게 내가 말하는 순차적 발전의 원리이다.

 

 

삶이 곧 운동

 

따라서 운동은 언제 어디서나 상시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운동은 특별한 장소나 상황에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삶이 곧 운동이다. 우리 삶 전체 국면에서 운동이 가능하다. (특히 오늘날의) 운동은 문화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사실 노동조합사무실에서 유유상종하는 집단 내에서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무실 뒤편에 쌓이는 소주병과 담배꽁초 수만큼의 퇴행이 매일매일 이루어진다고 봐야 한다. 자기 그룹 내에서 매일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비슷한 담화를 되풀이 하는 것은 소모적인 자기 독백일 뿐이다. 서로 옳거니하며 맞장구쳐대는 상황 속에서 의식의 성장은커녕 관성적인 자기최면만 고착화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집회란 이름으로 광장에서 외치는 투쟁의 언어들이 이런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시민대중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 채 우리끼리 투쟁사를 주고받는 것은 말하자면, 설득을 해야 할 사람은 왕따 시킨 채 설득이 전혀 필요 없는 내부자들끼리 공허한 구호만을 외치는 것과도 같다. 사회적 울림이 없는 집회는 시간 낭비, 돈 낭비, 에너지 낭비이다. 이런 소모적이고 관성적인 실천을 할 바에야 차라리 운동 접고 자기 삶에 충실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훨씬 운동적인삶이다. 생활 속에서 내가 만나는 한 사람이라도 설득해서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켜 내 세계에 동참하도록 이끈다면 그것보다 더 의미있는 실천이 없을 것이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우선 인간적인 신뢰를 형성해야 한다. 때문에 운동적인 사안으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만나는 것이다. 전략적으로 인간적인 척할 것이 아니라 진정성과 겸손에 터한 치열한 실천적 삶을 통해 신뢰와 존경을 쌓아야 한다. 교사의 경우, 아이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자기 수업에 철저하지 않은 사람이 무슨 교육의 진보를 외친다면 누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운동은 삶이다. 삶이 곧 운동이다. 일상 속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진보를 획책할 수 없다.

 

 

하방연대

 

모든 곳에서 운동이 가능하다면 한나라당 지지자 속에 들어가 그들을 약간이라도 왼쪽으로 이끌어 가는 것도 의미있는 운동이 되는 것이다. 다시 정상분포곡선을 떠올려보자.

 

 

 

 

진보라는 이름의 열차의 추진력은 좌파 역량지수와 우파 역량지수의 총합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반평균 올리기 위해서는 내신 1등급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6-7등급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사실상 전략상으로도 전자에 비해 후자가 훨씬 손쉽다. 나의 일천한 경험에 터한 주관적 판단이지만, 사회적 의식의 스펙트럼 상 좌측에 있는 사람들보다 우측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기가 더 쉽다. 꼴통좌파보다 우직한 우파에 변화를 도모하기가 훨씬 쉽다. 우파는 책가방 끈길이가 짧은 민초들이 많은데 이들은 일단 자기 지식의 빈곤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에 인간적인 신뢰만 형성하면 설득이 용이하다. 인간적인 호감과 신뢰를 쌓은 다음, 그들의 눈높이로 다가가야 한다. 그들이 나의 눈높이에 맞추길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3등급 학생이 9등급의 언어로 말할 수는 있지만, 9등급 학생이 3등급의 언어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운동권 가운데 굳이 어려운 말을 써가면서 민초들을 주눅 들이는 사람을 간혹 보게 되는데 민중은 직관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진보는 단순화이다. 민중을 진보로 이끄는데 그리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체계가 필요치 않는다. 아니 그들의 삶을 중심에 놓고 쉽게 풀어 설명하면 지식인들도 이해 못하는 이론을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 자체가 실천적으로 진보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자본>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학습자는 다름 아닌 피착취 근로인민인 것이다. 그러나 지식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그들이 스스로 과학적 세계관의 눈을 뜰 수는 없다. 우리의 역할은 이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유기적 지식인이 되는 것이다.

 

 

우파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자

 

 사회를 구성하는 대중의 총체적 의식 수준만큼 사회가 발전한다. 내 가까이 있는 좌편향의 근로대중뿐만 아니라 우편향의 대중이 변하는 만큼 사회가 바뀐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그렇게 돌아간다. 기관차를 구성하는 9개의 열차칸이 연동해서 움직이듯이 모든 것은 맞물려 돌아간다. 진보의 기관차는 선진된 의식을 가진 집단이 후진 집단을 견인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거꾸로 보수가 뒤에서 밀어붙임으로써 진보의 발전을 촉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나의 운동론을 밀어내기 운동론으로 이름 짓고자 한다. ‘사회발전=밀어내기라는 원근법으로 본다면 한나라당이 구태를 좀처럼 못 벗는 것은 민주당의 잘못이 크고, 민주당이 그러한 것은 진보정당이나 좌파 운동판의 잘못이 크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모든 것은 맞물려 돌아간다. 우리 운동판이 오래도록 구태를 답습해 온 것은 보수의 수준이 너무 한심한 탓이지만 그 만큼 진보의 잘못도 크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최근 한나라당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조짐을 흥미 있게 지켜보는 입장이다. 이명박의 한나라당을 좋아할 진보세력이 없겠지만 사회발전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한나라당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진보정당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만큼이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작년 겨울에 썼던 부분이고 이하는 이번 총선 이후 쓴 것입니다.)

 

 

진보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에 대해 반사적인 거부감을 갖는 것은 진보가 아니다. 이것은 수구꼴통들이 좌파를 빨갱이로 혐오하는 것만큼이나 지독한 편견이자 독선이 아닐 수 없다. ‘밀어내기 운동론의 관점을 갖게 되면 보수를 존중하는 겸허한 태도가 갖춰지니 이것이 똘레랑스의 자질이다. 그들은 우리와 단지 다를 뿐 우리보다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18대 총선 결과를 보라.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으면서 새누리당이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보수층의 강력한 결집에 힘입어 가능했는데 이들이 무슨 사악한 마음으로 결집한 것이 아니다. 이들을 움직이는 정서적 추동력은 다름 아닌 애국심이다. 가스통 할배들은 알바생이 아니다. 이들의 손에 몇 푼의 돈이 쥐켜지는 지는 몰라도 단순히 그 금전적 이익 때문에 이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김대중의 어법은 오만이자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양심대로 행동하는 법이다. 다만 그 양심이 건강한 양식에 터해 발동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개별 주체가 선택하는 정치적 포지션을 선과 악의 문제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진보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한다면, 진보의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 독수리5형제가 지구의 평화를 지킨다는 식의 유아적 상상력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노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역사관이 이러하다. 즉 역사의 발전을 선과 악의 대립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웃기는 것은 진보는 진보대로 자신이 독수리5형제라 생각하고 보수는 보수대로 정의의 사자를 자임하면서 맞은편에 있는 진보를 악의 무리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회에 나쁜 사람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명박 장로님도 소망교회에선 선량한 신앙인으로 존경받을 것이다.

 

 

 

진보적 역사관이란 진보의 추동력을 선악이 아닌 물질세계의 변화/발전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과학적 세계관으로서의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다.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론에 따르면 인간역사가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한 것이 진보이다. 그런데 선과 악이라는 프레임으로 들여다보면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은 엄청난 퇴행이다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물을 흘리면서 잉태된 것이다. 선량한 절대다수의 민중들의 고혈을 양분으로 생겨난 것이다. 민중에 대한 초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폭력은 엔클로저로 상징되는데,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이를 초식동물인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모어가 뭐라고 말하건 간에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발전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좌파든 우파든 이견이 없을 것이다.

 

 

 

 

미국 역사의 노예해방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링컨이 착해서 노예해방을 추진한 것이 아니다. 링컨도 처음에는 노예해방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목화산업에 기반한 남부 백인들보다 공업에 기반한 백인 부르주아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해방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흑인노예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선량한 인물들이고 남자 노예들은 이들 주인을 위해 기꺼이 남군 복장으로 전쟁에 뛰어든다. 북부의 자본가들의 입장에선 노예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공장을 돌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흑인 노동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승리가 흑인노예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이들이 농장 노예에서 공장 노예로 바뀐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들의 발에 쇠사슬이 풀려진 것이나 공장에서 흑인노동자와 백인노동자가 대등한 자격으로 일하게 된 것이 엄청난 진보임은 말할 것도 없다.

 

박근혜가 이끄는 새누리당의 변신에 대해서도 선과 악의 문제로 바라보게 되면 올바른 결론에 다다를 수 없다. 구 한나라당에 대한 골수에 사무친 감정으로 바라보면 이들의 변신을 그저 카멜레온의 위장쯤으로 치부해버릴 것이다. 나쁜 한나라당이 선량한 방향으로의 자기 혁신을 꾀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진보적 포지션에 있다는 사람들이 이런 평론을 내리는 한 이 사회의 진보는 어제도 내일도 요원할 것이다. 별도의 글에서 심도있게 논하겠지만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새누리당에 비해 새로운 것이 뭐가 있었던가? 성폭력의원과 논문표절 의원을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새누리당과는 대조적으로 성폭력 관련 치부를 숨기며 정진후 비례대표 의원을 옹호하기에 바빴던 통진당의 행태를 비교해 볼 때, 적어도 성평등이란 측면에서 통진당이 새누리당보다 과연 진보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박근혜의 새누리당의 변신은 개과천선한 결과, 즉 악에서 선으로 변신한 것이 아니다. 입장의 변화이고 그 변화의 동인은 변화를 바라는 민중의 열망을 수용한 것이다. 나는 이번 새누리당의 변신이 일시적인 제스처로 보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입장에선 어떤 식이든 기존 엠비 정권과의 차별화를 꾀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살 길이다. 그래서 성폭력 의원과 논문표절 의원을 쫓아내야 한다는 급진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정리

 

두서없이 장황하게 전개한 지금까지의 글에서 필자가 힘주어 말하고자 했던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사회의 진보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전체 대중의 정치적 의식 수준만큼 이루어진다.

 

그 수준은 좌에서 우로 편재되어 있는 정상분포곡선을 이루는데 사회적 진보는 이 곡선이 왼쪽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곡선을 구성하는 편재를 기관차에 비유할 때, 이 기관차는 각각의 열차 칸이 나름의 추동력을 갖고서 서로 엎치락뒤치락 작용(action)과 반작용(reaction = 반동)을 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앞으로 가자는 주장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변화의 물적 조건이 갖춰져 있지도 않은데 전진을 외치는 것은 좌경적 오류이다. 유념할 것은 새가 좌우로 번갈아 날개짓 하면서 균형을 잡아가듯이 좌파와 우파는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서로 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왼쪽 날개(좌익)와 오른쪽 날개(우익) 가운데 나쁜 날개와 좋은 날개가 있을 수 없듯이, 좌파-우파의 포지션 또한 선악의 문제일 수는 없다. 다만 좌파적 입장이 선량한 것은 당파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주체들 사이에서는 나쁜 진보나 착한 보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진보의 문제를 선악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에 대한 배타적 편견과 독선으로 이어진다.

 

진보의 문제를 선악문제로 생각하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진보라는 기관차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칸의 단위 객차가 지닌 동력 지수의 총합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좌파 영역 못지않게 우파의 혁신과 변화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파의 변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존중할 것이며 나아가 우파 집단 속에 뛰어 들어 변화를 추동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활동의 한 방편이다.

 

어떤 경우에도 좌파와 우파 그리고 진보와 보수는 공동운명체이다. 그리고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상대성의 문제이기에 진보 진영 내에서도 양 분파가 존재한다. 이것이 마오가 말한 비적대적 모순인데, 각 분파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대화와 토론을 통해 접점을 찾아가야 한다. 다만 조직 내의 집권 다수파가 종파주의나 기회주의적 행각을 일삼으며 조직 역량을 축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지만, 최소한의 원칙조차 저버리는 진보는 이미 진보가 아니다.

 

왼쪽 편에 서 있는다고 해서 저절로 좌파적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부족한 것을 알고 타오르는 지적 욕구를 갖고서 학습에 참여하는 사람끼리의 대화에서는 의식의 성장이 쑥쑥 일어나지만, 그렇고 그런 부류끼리 술잔 주고받으며 MB 따위를 씹어대는 뒷담화를 통해서는 의식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중의 의식을 진보적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진보적 역량과 자질을 가져야 한다진정으로 겸손한 자세와 함께 헌신적인 삶으로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

 

○ 18대 총선의 참담한 결과는 사실상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다. 문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대중의 우매한 선택이니 보수 정당의 얄팍한 정치적 쇼 탓으로 돌리는 한 진보진영의 발전은 요원해진다.

솔직히 진보정당이 새누리당보다 뭐가 나은 게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통해 심도 있게 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