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학교 화장실에서 -1

리틀윙 2011. 11. 19. 11:33

오늘은 토요일, 전담교사에게 수업이 없는 날이다. 으메 좋은 것!

갑자기 배가 사르르~ 자연이 부른다.

화장실에서 한참 볼 일을 보고 있는데, 두 남자 아이가 들어와 세면대에서 손 씻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한 녀석이 은밀한 공간에 누가 있는 것을 눈치 채고선 다른 한 녀석에게 말한다.

아이-1 : 야, 저 안에 누가 있다. 좀 골려주자.

아이-2 : 그래? 그런데 선생님일 수도 있잖아?

아이-1 : ......

 

내 입장에서 이 민망하고 불편한 상황을 서로 원만하게 해결하는 간단한 방법을 나는 물론 알고 있다. ‘으흠’ 소리를 내니, 두 녀석은 혼비백산 달아난다.

 

볼 일 보고 있는 사람을 골탕 먹이려는 생각을 품는 그 녀석은 특별히 나쁜 아이라기보다는 흔히 볼 수 있는 개구쟁이일 것이다. 이건 악행일라기보다 좋게 말해 나름 창의성을 발휘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항상 사물을 대할 때 이런 저런 시도를 하면서 객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을 품는 법이다. 창의성의 대명사인 에디슨도 어릴 때 짓궂은 장난질을 많이 해 꼴통 소리 들으며 자랐다지 않던가. 그러니까 이게 아이들의 세계인데 우리들 성장기에도 이런 모습들은 흔했다.

계속해서 이번에는 포커스를 그 장난질의 객체에 맞춰 놓고 모종의 교육학적 상상력을 발동해 보자. 만약 볼 일 보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또래의 소심한 아이였다면 그 순간은 분명 ‘위기의 상황’일 것이다. 소심한 아이에게 화장실에서 비호감의 향기를 발산하며 생리문제를 해결하는 자체가 고역이어서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하여 그저 이 순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인데, 바깥에서 악당(?)들이 자신을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소리가 들려오니 어찌 노심초사 불안에 떨지 않겠는가?

 

 

 

 

제 3자가 보기에 객관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어떤 아이에겐 엄청난 스트레스와 두려움의 실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이 고난의 짐을 벗을 수 있는가?

그 최선의 방법은, 그냥 그렇게 자라는 것이다. Let it be!

내가 말하는 ‘그냥 그대로’는 루소가 말하는 자연주의 교육방법, 혹은 노자의 개념으로 ‘무위(無爲 - 비틀즈의 Let it be는 무위를 영어로 옮긴 제목이다)이다. 그러니까, 우리들 자랄 때처럼 아이들을 던져놓고 키우면 저절로 자기 한계를 극복하며 성장해간다. 그리고 위기의 매순간을 이겨낼 때마다 아이의 정신 속에 단단한 굳은살이 생겨날 것이다. 다 그렇게 커가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주의 교육철학에서 말하는 ‘위기의 교육적 의의’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삶은 어떤가? 놀이터나 운동장 그리고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또래들과 부대끼며 불장난도 해보고 포르노 사진도 공유하고 하면서 자라야 하는데, ‘헬리콥터맘’의 의도하에 다람쥐 체바퀴 같은 일상을 시계바늘처럼 움직여야 하니 ‘자연적인 성장’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마마보이인 아이가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위기의 상황을 스스로 이겨내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어릴 때는 엄마에게 일러 바쳐 문제를 해결해나가지만, 냉혹한 사회에 던져질 때 그는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투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자신을 포기하는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많다. 요즘 아이들, 자살이 많은 이유도 이런 이치로 설명이 될 것이다.

삶의 본질은 ‘홀로서기’이다.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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