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우리사회에서 반(反)마르크스주의는 가능한가?

리틀윙 2011. 11. 5. 20:40

- 20075월에 쓴 글 -

 

앞부분 생략 -

 

우리 사회의 수준상,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수준'이란, 지적 수준이나 사회적 성숙도를 말합니다.

1) 사회적 성숙도 : 이곳은 어떤 사회인가? 이에 관해 제가 다른 곳에서 쓴 글을 인용해봅니다.

 

1980년대까지 [자본, Das Kapital]이 번역되지 않은 나라는 전세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이곳밖에 없었음을 일러두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매우 특별한 사회이다. 히틀러의 만행을 능가하는 일제 식민지를 겪고도 식민지 시절 적극적 친일 행각을 벌였던 자들이 독립된 이후에도 지도층이 되어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지금까지도 자자손손 부를 축적해 오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인으로 말하자면 히틀러에 해당하는 일본천황에게 피로써(혈서와 선서) 충성을 맹세하며 일본군장교가 되어 민족 독립을 저지한 자가 해방된 조국에서 국가원수로 둔갑해 민주주의와 피억압 민중을 위해 저항하는 양심세력을 얼마나 많이 짓밟고 고문하고 죽였던가. 그럼에도 그는 이 나라를 흥하게 한 불세출의 영웅이란다. ‘이곳에서는 민족을 배반하든, 부정부패를 저지르든 마르크스주의자만 아니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아니더라도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덮어씌우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였다.

 

2) 지적 수준 :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지적 수준은 앞서 말한 '사회적 성숙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겠죠. 초중등학교나 대학교로 이어지는 교육의 장에서, 공산주의자라 하면 "머리에 뿔 달린 악마"쯤으로 학생들에게 각인시켜온 이 사회에서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지적 탐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따라서, 최소한 30대 후반의 사회인들은 "나는 반마르크스주의자이다"라는 말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이 온당할 겁니다.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작은 물고기들에게 잘 대해 줄까요?”

K씨에게 주인집 여자의 꼬마가 물었다.

물론이지” ... “그리고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작은 물고기들에게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를 멀리 하라고 가르칠 거야. 작은 물고기들은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런 경향을 드러내면 즉시 상어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배울 거야.”

- 브레히트, <상어가 사람이라면>

 

사실상 마르크스주의는 너무 어려워서 누구든 감히,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이다"라고 선언하기 힘듭니다. 마르크스주의의 결정체라 할 [자본론]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만한 지성이.... 나는 한국사회에서 열손가락을 꼽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보다는 '반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상식적으로, "A에 대해 대립적 관점을 가지려면, A에 대해 꿰뚫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968년 강원도에서 8살짜리 꼬마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고 하죠. 공산당의 지적 근거는 '마르크스주의'인데, 도대체 8살짜리 이승복이 맑시즘에 대해 뭘 안다는 말인지... (이승복의 신화는 조선일보가 만들어내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한다"는 어떤 언명은 반공소년 이승복의 외침 만큼이나 유치한 넌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짜장면에 대해 비판하자면, 짜장면을 만들어봤거나 최소한 먹어본 경험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학자치고 맑시즘에 정통한 인물을 보기가 드뭅니다. (나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에서 '교육사회학'이란 걸 배워봤습니다. '사회학' 이론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기능론''갈등론'이란 양대산맥에서 한 축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를 도외시 하는 사회과학은 "절반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은 셈입니다. 그래서 한심한 교수들이 쓴 [교육사회학]을 보면 예외 없이 맑시즘을 다루기는 합니다. 대부분 "비판적 관점으로" 다루는데.... 다른 전공과목은 잘 모르지만, 이 나라 '교육사회학' 교수치고 맑시즘에 대해 ''자라도 아는 교수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찌집니다. (거의 대부분 중고등학교 윤리교과서 수준을 못 넘어서며, 다소 정교한 논리가 있다면 외국의 학자들이 쓴 글을 배껴서 자기 책 속에 담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1) 지식인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는 힘듭니다. 2) 이 한심한 사회에서 반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울지언정 맑시즘은 '사변'이 아닌 '현실' 그 자체를 다룹니다. 그래서, [자본론]의 철학적 진수는 읽기 힘들어도, 마르크스가 뭘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가슴'으로 읽는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삶이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짓밟혀본 '노동계급'은 누구보다 쉽게 맑시즘을 받아 들일 수 있을 겁니다. -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니까 말입니다. 우리 이웃들의 삶을 둘러봅시다. 90년대초부터 교직생활을 해오신 분들은 IMF 이후에 아이들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반면, IMF 이후에 이 나라에서 백만장자의 수는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도시의 아이들은 운동장이 좁아 터져 맘대로 못 놀지만, 농촌 아이들은 광장 같은 운동장에서 공을 같이 찰 또래가 없어 못 놉니다. 한쪽은 못 가져서 소외되고, 다른 한쪽은 너무 많이 가져서 (사치와 향락으로) 소외되어 갑니다. 우리 시대에서 학교는 더 이상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 아닌 생존을 위한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고, 교육은 교육상품이외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전인교육'에 대한 고민은 찾아 볼 수 없고,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몸매가 바뀐다"는 따위의 징그러운 구호가 학급급훈으로 교실 벽면에 붙어 있는 것이 이 나라의 교육현실입니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인간다운 성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가는 학부모는 교육이민을 떠납니다. 도무지 비상구를 찾기 힘든 이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점점 미쳐갑니다. 과연 이를 사람 사는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는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가 극도로 만연된 사회입니다. 맑시즘의 '소외(alienation)'는 일상적 의미의 소외와는 다릅니다. 간단히, "본래의 그 무엇으로부터 멀어져가는 현상"으로 풀이하겠습니다. 교육이 교육 본래의 의미를 잃고,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황폐화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내가 이 글 제목에서 "우리 사회에서 반마르크스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것이 지적으로 어려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치에 의해서도 그러하다는 것을 결론으로 맺고자 합니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양심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무지해서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지성인이라면, 자신이 모르는 무엇에 대해 덮어 놓고 반대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적어도 지성인이라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