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미국은 없다

리틀윙 2011. 10. 18. 17:04

   나이 사십 후반이 되도록 그 흔한 해외여행 한 번 못하고 살다가 작년에 난생 처음으로 가본 나라가 미국이었다. 6개월 영어심화연수 과정의 마지막 코스로 4주간 미시간대학(MSU)을 경험했다. 어학 공부가 목적이었지만 영어를 배운 것은 별로 없고 미국 문물 체험을 잘 하고 왔다. 유감스럽게도 올해 영어전담교사를 맡고 있지는 않은데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학교 형편상 그러하다. 현재 영어전담을 맡고 있는 선생님 또한 해외연수를 다녀온 터인데 영어교과 시수 편재상 두 사람이 영어전담을 맡을 수가 없어 내가 양보한 것이다. 아무튼 미시간에서 4주간 체류하면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과 함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했는데 이런 의미있는 경험들은 그대로 교단에서 양질의 학생교육을 위한 자양분으로 작용할 것이다.

   미국에 가기 전에도 영어전문교사로서 영어문화권 원어민교사들을 접촉하면서 미국에 대한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이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예전에 가졌던 미국에 대한 선입견이나 환상을 어느 정도 고쳐나갔는데, 막상 현지에서 체류하면서 미국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지금 소개하는 이 책은 그러한 나의 판단에 입각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이렇게 독후 노트를 쓰게 된다.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Gone The America We Know> 제목이 Gone으로 시작하니,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제목 ‘Gone With the Wind'가 생각난다. 스칼렛 오하라가 간직했던 과거의 영화는 남북전쟁으로 한방에 바람과 함께 사라졌지만, 미국이 한 세기 가까이 누렸던 영광은 “자본주의와 함께 사라지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는 그런 관점을 피력하지 않지만, 미국은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미국자본주의의 심장 월스트리트는 자본주의의 아바타다. “우리가 아는 미국이 없다”면,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도 없는 것이다. 그 증거는 공교롭게도 이 책이 한창 베스트셀러로 유명세를 누리는 바로 지금 미국 자본주의의 핵인 월스트리트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웅변으로 말해준다.

 

 

 

 

   칼 맑스의 용법으로, ‘자본주의’란 한 줌밖에 안되는 부르주아가 절대다수의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근간으로 돌아가는 사회이다. 이 명제는 지금 다음과 같이 리메이크 되어 미국을 넘어 전세계로 번져가며 자본주의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다: “1퍼센트가 99퍼센트를 지배해온 세상을 바꾸자!” 내가 너무 속단하는지는 모르나, 지금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지는 시위는 여러모로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연상케 하는 세계사적 사건의 전조가 아닌가 생각한다. 쌍둥이빌딩 위에서 파티 열며 아래쪽의 시위대를 향해 자기네들끼리 히죽히죽 거리다가 카메라에 포착된 부르주아들의 모습, 그들의 조소 섞인 표정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 떠들었던 마리 앙뜨와네뜨의 철없는 행태와 오버랩된다. 물론 그때보다는 고상한(?) 시대여서 이들이 단두대에서 목 잘리거나 할 일은 없겠지만, 1%의 운명이 어두운 것만은 확실하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주인에 대한 노예의 의존도보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의존도가 더 높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에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위대한 헤겔의 통찰로서 이는 나중에 맑스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란 개념으로 차용된다. 지금이 혁명이 임박한 시기인지, 그리고 그 주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인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99%에 의한 반란은 맑스가 말한 ‘계급투쟁’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지고 없는 마당에 천년만년 갈 줄 알았던 자본주의에 왜 이런 위기가 오고 있는 것일까? 그건 너무나 당연하다. 노예의 생존 없이 주인의 생존이 불가능한 그 이치 때문이다. 맑스의 말대로, 자본주의 시스템은 제 살 제 뜯어 먹고 사는 괴물과도 같다. 1%가 자본주의의 머리라면 99%는 몸통과 팔다리인데, 머리는 몸통에 의해 지탱되는데 전자가 후자를 야금야금 뜯어 먹고 나니 결국 머리도 살아남을 길이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운명인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스템이 존속되기 위해서 1%는 99%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고상한 자비심의 발로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으로 99%에게 뭘 양보해야만 하는 이른바 ‘개량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어지간한 개량적 조치로는 무너져가는 미국 자본주의를 회생시킬 수 없는 듯하다. 그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사실, 시민 대중의 각성에 따른 봉기와 가장 거리가 먼 사회가 미국이다. 내가 미국에서 절실히 느낀 바가 그것이다. 즉, 미국인들의 삶은 사회 문제의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대학교육까지 받은 성인들이 얼마나 무식한지 모른다. 우리가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만나는 지적인 미국인들은 인구의 1%도 안된다. 나머지 99%들은 하고 한 날 파티나 록 콘서트 그리고 프로 스포츠를 즐기며 살아가는 ‘배부른 돼지들’이다. 그나마 1%의 지성인들도 자기 삶에 만족을 하기에 하등의 사회적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점에서 ‘불만많은 소크라테스’와도 거리가 먼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지성인 집단 가운데 노움 촘스키와 작년에 작고한 하워드 진 외에 비판적인 지식인이곤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미국사회에서 누가 선동하지 않았는데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나 1%가 지배하는 사회를 위협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놀라움’이 아닐 수 없고 그것은 그 만큼 절실하다는 방증이다.

 

"내 나라를 위해 두 번째 싸우고 있지만 나의 적이 누군지를 깨닫기는 이번이 처음"

퇴역 군인이 이러한 각성을 이룰 정도라면.....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다른 자본주의 사회는 번영을 누리는데 유독 미국만 경제적으로 쇠락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미국의 자본주의가 무너진다는 것은 세계자본주의의 몰락을 의미하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시각이다.

 

 

개인적인 논평은 이로서 접고 다음부터는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의미있는 부분을 한 꼭지씩 노트해 공유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