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한 미국인의 북한사회 비판에 대한 나의 생각

리틀윙 2011. 7. 20. 09:56

이 글은 작년 여름에 쓴 글입니다. 북한 사회에 대한 이야기인데, 최근 북한의 3대세습이라든가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기 전에  쓴 글이라 김정일 체제에 대한 비판이 좀 너슨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쓴다면 3대세습을 신랄하게 비판했을 겁니다.

 

 

 

이번 연수과정 - 당시 제가 영어교사 연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 에서 한 원어민 선생님으로부터 <Small Group Discussion Topics for Korean Students>란 책을 소개받았다. 이 흥미있는 책의 저자는 Jack Martire란 분인데, 1980년에서 1998년까지 한국의 부산과 서울의 대학교에서 ESL 강사로 일한 경력이 있다. 한국에서 다양한 지역과 오랜 기간동안 있었던 점을 미루어 그는 이 나라의 이모저모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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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한국에 관한 그의 여러 견해들에 대해 대부분 동의한다. 지금까지 그의 책을 반 남짓 읽었는데, 주로 몇몇 민감한 문제들을 중심으로 훓어보았다. 한국의 자동차문화(7쪽), 러브호텔(34쪽), 남아선호풍조(43쪽), 군사문화의 소산(52쪽), 이러한 흥미있는 주제들은 한국사회의 치부들에 대해 요목조목 짚고 있다. 그의 표현은 다소 냉소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나는 그의 비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옳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한 가지 이슈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것은 북한에 관한 것이다.

 

북한에 대한 내 입장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나는 그저 내가 진보적인 사회운동가인 양 하면서 북한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부류는 아니다. 철학적으로 나는 맑시스트임을 감히 말하겠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나는 북한을 선량한 국가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해방과는 거리가 먼 체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북한은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도 없는 체제이다. 그것은 봉건적 전제군주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사회에 관해 고찰함에 있어 우리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몇몇 중요한 점이 있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그 특별한 역사적 배경에 관해 고려해야 한다. 기실 한국전쟁을 제쳐놓고선 그 누구도 북한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 한국전쟁은 남한 대 북한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 대 북한의 전쟁이었다. 세계 최강 군대의 무지막지한 공격으로부터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버텨낸 전쟁이었다. 북한은 미국이 도중에 전쟁을 포기한 최초의 나라인데, 어떤 이들은 한국전쟁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하기도 한다. 

미군이 북한을 상대로 감행한 공격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전략은 적의 영토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미공군은 북한의 주요 도시들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는데, 폭탄의 양으로 치면 2차세계대전 시 미군이 일본을 상대로 퍼부은 폭탄의 3.5배가 된다.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인해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서는 2층 이상의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미군 조종사가 상관에게 “적의 영토에서 더 이상의 공격할 타겟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Massacre in Korea: Picasso, 1951>

 

그러나 북한은 이 엄청난 재앙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다. 나아가 그들은 가공할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나 국가를 성공적으로 재건시켰다(적어도 한때는).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나았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별로 없다. 실로 그것은 김일성의 탁월한 지도력에 힘입은 일종의 기적일 지도 모른다(불량신문 따위가 이 문장만을 추출하여 글쓴이를 귀찮게 하지 않길 바란다). 따라서 북한 인민들이 김씨 가문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존경심을 품는 것은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씨 세습체제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에게 읽힐 목적으로 썼던 글이기에 너무 부끄러워 원문에선 이 말을 적지 않았지만...... 박정희 시절까지 한국의 경제력은 ‘매춘경제’란 말로 대변된다. 기타리스트 신중현의 전기를 읽어보면, 60년대말 당시 미군부대를 통해 벌어들인 외화가 한국의 총수출액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최고의 뮤지션들은 예외없이 미8군에서 일했는데 이들 딴따라들과 속칭 양공주들이 말하자면 수출역군이었던 것이다. 그 후 박정희시대에 들어와서 매춘경제는 일본인에게로 확대된다. 그리고 박정희는 보잘것없는 달러를 손에 쥐기 위해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없던 것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한일국교정상화’라는 합의를 해주었다. 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짓고 조국근대화를 이룬 것은 잘 한 짓으로 평가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민족적 자존심이란 측면에서 후손들은 분명히 굴욕적 외교의 대표적 사례로 기억할 것이다. 반면, 온 인민이 굶어 죽어가도 북한은 아직까지 일본과 합의를 보지 않고 있다. 아무튼, 박정희 시대까지 북한은 우리 누이들의 순결을 팔거나 매판적인 외교를 통하지 않고 자신들이 즐겨쓰는 말로 “주체적으로” 경제를 재건하여 남한보다 훨씬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었던 점을 기억하자.)

 

한국전쟁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군주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실패에 대해 자신의 심각한 오류는 인정하지 않고 연안파와 소련파에 죄과를 물어 처형하거나 남로당의 박헌영 같은 지도자에게는 미제 간첩이라는 황당한 오명을 씌워 학살하는 식으로) 자신의 라이벌들을 제거하는 피의 숙청이 이어졌다. 숙청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김씨 세습체제의 왕국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글쓴이가 김씨 가문과 북한 체제에 대해 반감을 품는 이유이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들 그는 남한의 어떠한 독재자들보다 나은 인물이다.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흔히들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핵심인물로 알고 있지만, 해방을 위해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이승만은 미국 본토에서 한반도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치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는데, 프란체스카라는 외국여자하고 연애질 하느라고 바빴지 독립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심지어 그 당시 돈으로 100만원이나 되는 독립군 자금을 횡령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 이이화의 책인데 제목은 기억안남) 반면, 김일성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던 투사였다. 한국현대사에서 이승만이 남긴 것은 오직 부패와 무능밖에 없다. 이승만 시기에 한국에 머물렀던 한 영국인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싹트기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그의 말은 옳지 않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한국 민중의 불굴의 의지와 끊임없는 투쟁으로 사악한 독재자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실로 무수히 많은 무고한 민중들과 숭고한 민주투사들이.... 제주도와 거창 그리고 통영, 지리산, 문경, 가창, 그리고 광주에서 산화해갔다. 실로 남한의 민주주의 역사는 현대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로 얼룩진 역사인데, 그 과정 속에서 잔혹한 독재정권 못지않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저지한 최악의 방해물은 미국이었다.

이승만의 뒤를 이은 박정희는 친일군인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는데 그가 맡은 임무는 독립군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제가 망할 무렵엔 일본군복을 벗어던지고선 광복군 군복으로 갈아입고선 자신의 고향에 금의환향했다. 그 뒤 군사 쿠데타를 성공시켜 정권을 장악했다. 자신의 심복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18년동안 그의 통치기는 수많은 민주투사들에 대한 고문과 학살 그리고 부정부패로 점철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섹스광이기도 했다. 심지어 죽는 그 순간에도 요정이라는 박정희 개인을 위한 유곽에서 여대생과 동석했다. (그녀가 어떤 목적의 파트너일 것이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정인숙이 어떻게 죽었는지 또 그의 아들 정승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나아가 자신의 둘째 아내 육영수가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육영수가 죽기 전에 윤○○이라는 배우가 왜 한국을 떠났는지... 이 모든 의혹이 박정희의 배꼽아래 부분과 관계있다. 박정희씨는 “남자의 배꼽 아래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자”고 제안했지만, 그러기엔 그의 죄가 너무 크고 심각하다.)

그럼에도 그는 단지 경제를 살렸다는 이유로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구역질나는 과거를 아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더욱 웃기는 것은 박정희의 맏딸 박근혜가 한국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이룬 결과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차기 대선에서 그녀가 가장 유력한 후보자일 것이라는 점은 기정사실로 굳어있다. 참으로 웃기는 사회이다.

 

 

 

또 다른 코미디는 맹목적 반공주의의 화신인 한국의 언론매체들이 북한의 지도자들을 부도덕한 패륜아들로 묘사하는 점이다. 사실, ‘탕아’로 말할 것 같으면,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남한 지도자들에게 어울리는 호칭이다. 이는 그야말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티끌을 갖고서 씹어대는 격이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웃기는 사회인가? (우리 어릴 때 ‘지금 평양에선’라는 제목의 연속극이 있었는데, 거기서 김일성 부자를 색광으로 묘사하곤 했다. 나도 북한의 지도자가 청교도적 삶을 살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적어도 박정희와 전두환이는 그런 수준이하의 드라마로 국민들의 말초적 감각에 호소하는 반공교육을 지시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잭 마타이어 씨도 언급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비참한 삶을 연명하며 신음하는 동안, 김정일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97쪽).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러하다면, 김씨 세습체제는 벌써 무너졌을 것이다. 비록 그 체제가 군주제에 가깝긴 해도, 김씨 왕조는 봉건 프랑스의 루이 16세와는 다르다. 북한이 그 체제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공포정치가 아닌 인민의 자발적 존경에 기반한 것으로 봐야 한다(지금 다시 쓴다면 이 부분을, "공포정치 외에 인민의 자발적 존경..."으로 적겠습니다).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의 북한기행문이 그 같은 사실을 생생하게 보고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책은 김일성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의 후계자 김정일의 북한사회는 사뭇 다를 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신컨대 인민들이 극도의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데 김정일은 자신의 욕심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지도자는 아닐 것이다. (그런 식의 평가는 일국의 원수는 물론 그 인민들에 대한 악의적인 모독일 뿐이다. 북한사회는 매우 특별한 사회이다. 특별히 나쁜 점도 많을 지언정, 평범한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그 무엇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서구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또 있다. 오늘날 북한이 그토록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미국정부가 집요하게 펼쳐온 가혹한 경제봉쇄 정책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랜 자연재해로 인해 그 사회는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 사실, 그토록 심각한 위기에 처한 나라가 전쟁을 희구한다는 말처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항상 미국의 손에 있었다. 현대사가 미국이 peace-maker가 아니라 death-maker임을 보여준다. 그 같은 내막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 많은 책을 읽을 필요 없다. 노움 촘스키의 책 [미국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 이 한권으로 충분할 것이다.

 

 

내 생각으론, 평균적인 한국인이나 미국인은 북한사회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오랜 세월동안 학습을 통해 각인되어온 반공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마타이어씨도 그런 부류에 속해 있는 것으로 나는 본다. 최소한 북한에 대해서 그는 입을 떼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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