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의식

변증법적 사고와 형이상학적 사고

리틀윙 2010. 5. 31. 18:17

형이상학은 각각의 사물을, 그 자체만으로 ; 모든 다른 것과 분리된 것으로 ;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의 관점에서 ; 양자택일(이것 아니면 저것)의 문제로 본다. 형이상학적 방법은 사물들을 그 진정한 운동과 상호연관의 관점에서 고려하지 않으며, 모든 주체가 대립물의 통일을 표현한다는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형이상학과 반대로 변증법은 사물을 끝없는 변화․발전의 과정 속에서, 복잡하고 계속 변하는 상호연관의 과정 속에서 생성․존재․소멸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모리스 콘포스, 유물론과 변증법: 81-82쪽).

 

 

헤겔은 변증법적 관점의 의의를 시사하는 한마디로 “진리는 전체다 Das Wahre ist die Ganze”란 말을 남겼다. 뭐든 따로 따로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오류로 흐르게 된다. 요컨대, 연관의 맥락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증법이고, 따로 따로 떼어서 바라보는 관점이 형이상학인 것이다.


사물을 연관적 맥락이 아닌 현상 그 자체만으로 판단하는 사고방식을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런 분들은 대부분 지독한 편견과 아집의 소유자들이다. “여자는 원래 그래” 따위의 어법이 그 전형이다. 보봐르의 말대로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길들여지기에, 남성들이 비하하는 여성의 어떤 속성들은 여성에게 날 때부터 내재된 것이 아니라 후천적 환경(교육)과 물적 조건의 산물인 것이다. 마가렛 미드의 흥미있는 보고서 [세 부족에서의 성과 기질]을 보면, “여자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 여성이 속한 사회적 환경에 따라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여성성을 갖게 된다. 아라페쉬 부족은 여성과 남성 모두 온순하고 협동적이어서 ‘여성적인 특질’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반면 먼더거더 부족은 남성과 여성 모두 공격적이고 자기 주장들이 강해 ‘남성적인 특질’이 지배하는 사회로 분류된다. 마지막으로 챔불리 부족의 특질은 매우 흥미로운데, 이 부족은 문명사회의 경우와는 반대로, 여성이 사회를 씩씩하게 주도해가는 반면 남성들은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치장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는 원래 그래!” 라는 따위의 어법은 역사적으로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거나 일제가 조선인의 착취를 정당화 할 때 쓰던 수법이기도 하다. 흑인/조선인은 태생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에 매로 조져야 하고, 유전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백인/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 특별히 몰염치하거나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에는 그게 하나의 상식처럼 그들의 관념을 지배하기도 했을 것이다. 젠센(Jensen, A.) 같은 학자들은 1980년대까지도 유전적으로 흑인의 지능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논문을 발표하곤 했다. 심지어, 롬브로소(Lombroso, C.)는 범죄자도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황당한 논리를 펼쳤는데, 그에 따르면 특정 형태의 두개골을 가진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는 원래 그래!” 그 3탄으로 한국 사회에서 특정지역민들에 대한 편견으로 이 말을 잘 쓰는 경우를 언급하고 싶다. 이러한 반변증법적(=형이상학적) 사고가 기실, 롬브로소나 젠센 같은 꼴통 학자들뿐만 아니라 선량한 양식을 가진 우리의 이웃들 사이에서도 만연된 그릇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현상수배범 전단지에서 특정 지역 출신이 많기 때문에, “○○는 원래 그래!”라고 생각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하필 그 지역 사람들이 많은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쳐야 할 것이다. 학교에서도 그렇다. 도벽이 심한 아이들은 예외 없이 가난한 집 아이들이다. 생각해보라. 필요한 모든 것을 부모님이 다 해결해주는 부자집 아이들이 왜 문방구에서나 빈 교실에서 남의 물건을 훔치겠는가?


이처럼 현상을 빚게 한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않은 채 눈에 보이는 일면적인 결과만을 놓고서 결론을 쉽게 내리는 사고방식이 ‘형이상학적 관점’이다. 이에 반해 ‘변증법’은 모든 것을 연관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관점의 또 다른 특징은 사물을 변화/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형이상학적 사고는 사물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철학사적으로 서양보다는 동양의 사고가 훨씬 변증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노장사상은 변증법 그 자체이다. 노자의 ‘새옹지마’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법칙이 뭘 뜻하는지 절묘한 어법으로 말해준다. ‘상전벽해’니 ‘전화위복’이니 하는 사자성어들도 마찬가지로 세상의 이치가 변증법적으로 전화(轉化)되어 돌아가는 원리를 표방하고 있다.

고대 인류 정신의 보고라 할 ‘성서’에도 변증법적 혜안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의 세공인에게 명령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어라.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치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기도록 해라. 또한 그 글귀는 내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함께 줄 수 있는 글귀여야 한다.” 세공인은 왕의 명령대로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거기에 어떤 글귀를 써넣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고민하던 그는 지혜롭다고 소문이 난 솔로몬 왕자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왕자님, 임금님의 큰 기쁨을 절제하게 하는 동시에 크게 절망했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솔로몬 왕자가 말했습니다. “이 글귀를 넣으십시오.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승리에 도취한 순간에 임금님이 그 글을 보시면 자만심 곧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님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 글을 보시게 되면 이내 큰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변증법적 사고이다. 반대로, 현재의 상태가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믿는 사고방식이 형이상학이다. 사실, 현재의 한국사회만큼 급변하는 경우도 잘 없을 것 같다. 모레가 지방선거일인데, 그 뒤로 또 어떻게 상황이 반전될지, 참으로 신경 쓰인다!


변증법적 사고의 또 다른 특징으로, 사물을 양자택일이 아닌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논의되어야 하는데, 지면관계상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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