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의식

존재와 의식 - 선(善)의 문제

리틀윙 2009. 8. 23. 12:52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3가지의 덕목을 대개 '진선미'로 규정합니다.

이 세 가지의 가치체계는 시대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의의를 지녀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 제가 쓰고 있는 글의 요지입니다.

앞글에서는 '미'의 문제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선'의 문제 즉,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 또한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객관적 기준에 의거해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것을 이 지면에서 풀어볼까 합니다. 이 문장에서, "사회적으로"라는 표현이 "특정 사회의 존재양식"과 관계있습니다.



인류학 관련 서적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리포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인류학자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아프리카의 어느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부족은 가부장제가 아주 심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산 채로 남편과 함께 땅 속에 들어가 남편 수발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옛날엔 이런 풍습이 있었죠. '순장'이란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6세기초인 지증왕때 이르러서야 순장을 금지하기 시작했죠)

인류학자의 눈에 이것이 불합리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엉뚱하게 죽음을 앞둔 어떤 부인에게 인류학자가 '설득의 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이건 어리석은 짓이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라는 식이었겠죠.

생매장을 달갑게 맞이할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그 여인은 문명세계에서 건너온 인류학자의 합리론에 수긍을 하여 두 사람이, 말하자면 야반도주를 감행하였습니다.

마을을 벗어나 외진 곳에서 야영하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보니 여인이 사라진 것입니다. 옆에 사연을 남긴 쪽지가 있었는데 그 내용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기부족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위의 문장을 대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이 여성의 판단과 행위는 하등의 합리성도 엿볼 수 없는 '미친 짓'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부족에서 이 여성의 선택은... 말하자면, 타의 귀감이 될 '선' 그 자체였겠죠.

"미친 짓"이라 치부하지 말고 조금만 사고를 확장해보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우리 사회(조선시대)에서도 이 같은 진풍경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효부'니 '열녀문'이니 하는 상징이 이를 말해줍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열녀문] 중에서 평생 수절한 공로로 열녀문을 하사받은 시할머니가 과부가 된 손부(최은희)를 훈계하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통해 '양심'이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난 잡생각이 들 때마다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서 그 피를 닦아낸 솜이 장롱에 하나 가득이다. 너처럼 분단장을 곱게 하고서야 어떻게 수절을 하겠니. 쯧쯧.”

 

 

 

 

 

현대사회에서는 어떨까요?

위의 원시부족사회의 여성이 생각하는 양심이 비합리적인 것이라면, 혹 지금 우리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체계 가운데 불합리한 것이 없는지 돌아볼 필요를 느낍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남편이 형편없는 사람이어도 자식새끼 놔두고 이혼을 결심하는 여성을 대할 때, 그 여성의 부모(씨댁 또는 친가)들이 그녀의 선택에 대해 '모질다'는 생각을 품기 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그런 선택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며 어떠한 경우라도 이혼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사회를 제외한 문명사회에서 한국만큼 가부장의 질곡이 심하게 남아있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상한 풍습을 1천년 뒤의 후손들이 안다면 그 충격은 지금 우리가 위의 원시부족 사회의 모습을 볼 때 느끼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필종부'라는 말로 요약되는, 남녀 관계의 불합리성은 현대서구사회에서도 당연한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식에 균열이 가기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이후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체계가 등장한 이후부터였죠.

6-70년대까지 미국의 팝음악의 주류를 차지했던 컨츄리 송을 뜯어보면 '남존여비'의 미국 풍속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Tammy Wynette의 [Stand By Your Man]이라는 노랫말을 보면, 미국과 한국의 차이가 별로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남자의 몸에서 다른 여자의 향내가 나더라도, 참아라. 왜냐하면... 그는 남자이니까... 'cause after all he's just a man...

 

 

 

 

 

p.s.) 컨츄리 음악에 대해 한마디!

교회의 가스펠 송이 그러하듯이 컨츄리 송 또한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하게 다가오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서 매일 벌어지는 치열한 삶의 고민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읊어대는 막연한 낙천주의의 마력은 '마취'에 가까우며,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며 여성 따위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인종지덕(忍從之德)을 설파하는 반동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이들 음악의 당파성(partisanship)인 것입니다. "country road,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존 덴버를 따라 흥얼거릴 때, 1890년 크리스마스 시즌 파인릿지에서 학살당한 아메리카인디언들의 최후를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같은(almost heaven) 북아메리카 대자연의 발밑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로 얼룩져 있음을 잊지 맙시다.

모든 예술은 당파적입니다. '예술의 당파성'에 대해서도 나중에 깊이 있게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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