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의식

자본주의와 여성

리틀윙 2011. 11. 7. 19:58

'존재와 의식'이란 주제로 오랜만에 씁니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존재와 의식과의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명제를 다시 정리하면,

->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양식)가 의식을 규정한다.

-> 경제적 토대(하부구조)가 정치/이데올로기 상부구조를 규정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새로운 명제를 하나 추가하면, “어떠한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지배적인 의식(사상, 이데올로기, 가치관)은 지배계급의 의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마르크스의 말입니다.

시대의 지배적인 의식이 지배계급의 의식이라 할 때 지배계급의 의식이란 지배계급에게 유리한 의식을 뜻하겠죠. 이 글과 관련하여, ‘바람직한 여성상도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여성상을 의미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상은 어떠한 시대보다 자본주의에 이르러 획기적으로 변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가 되겠습니다.

마르크스의 정식(사회구성체론)에 따르면 인류역사에서 계급사회는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해왔습니다.

고대노예제 중세봉건제 근현대자본주의사회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는 여성이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대의 여성들이 집안에서만 일 한 것은 아니죠. 농경사회의 여성들은 집안일 외에 힘든 농사일까지도 떠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농사일 또한 가사(집안일) 노동의 연장일 뿐 사회적 노동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시대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입장에서는 여성을 집밖으로 나오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여성상에 대한 개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미국민중사>에서 하워드 진의 말을 인용하면, “... 여성에게 자신만의 영역을 부여함으로써 이런 공간과 시간을 이용해서 또 다른 종류의 삶을 준비하게 될 가능성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종류의 삶이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공장으로 향하는것을 말하겠죠.

어떤 의미에서 이 같은 변화는 여성해방의 단초로 볼 수도 있습니다. , 자본주의가 봉건사회의 질곡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킨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중세 농노들에게 씌워진 신분예속의 사슬을 자본주의가 풀어준 것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역사 속 어느 시점에서 부르주아계급이 담지한 긍정적인 역할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 발전이 이와 같은 식으로 이루어진 주된 동력이 그들의 선량한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계급적 입장이 그러한 변화와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식이 존재(입장)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합니다. 역사 속의 어떤 인물이나 집단이 행위하고 그에 따른 결과가 초래되는 인과관계에 대해 선악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관점은 역사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방해하는 가장 해로운 방식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역사교육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 같아 유감입니다.

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이뤄진 해방은 노동자와 여성 자신을 위한 해방이 아닌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에서, ‘해방이라기보다는 낡은 생산관계의 해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어법이겠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 초기에 노동자와 여성에게 부과된 노동의 고통은 봉건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사이야기도 이 같은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미국민중사]에 적힌 로웰공장의 시간표를 보면, 여성노동자들이 새벽 다섯 시부터 저녁 일곱시까지 생리적 욕구를 처리할 수 있는 단 한 시간을 제외하고 쉼 없이 계속 일할 것을 강제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매일 아침 노동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다섯시에 일어났다...... 불빛이 켜지면서 시작된 공장 일을 열두 시까지 쉬지 않고 계속 해야 했다. 작업들은 주로 선 채로 하는 일이었다. 점심시간은 3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그마저도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빼면 더욱 짧아졌다. 그러고는 공장에 다시 들어가 일곱시까지 일을 계속 했다...... 일 하는 시간 내내 작업장의 노동자들과 석유등잔이 공기 중의 신선한 원소들을 완전히 없애버렸고......” (210-211)

 

결코 먼 나라 먼 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970년대 청계천의 피복공장 여성노동자들에 주어진 작업환경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18세기 미국 로웰이나 20세기 한국의 여성들이 방직공장으로 향한 것은 여가 선용의 차원이 아니라 절박한 삶의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여성들이 직업전선으로 나가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역사적으로 궤를 같이 하는데, 이 같은 변화는 여성들의 삶에서 몇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이중의 착취 구조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가사노동이지 사실상 이것은 가정 내에서의 여성에 대한 착취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억압적인 시대 억압적인 사회일수록 여성은 가내노예의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여성은 흑인 노예(흑인여자는 이중의 고통)와 마찬가지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시대에 이르러 공장에 취업한 여성에게는 이중의 고통(흑인여성은 삼중의 고통)이 드리워집니다.

 

둘째, 그럼에도 여성이 사회적 노동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은 여성 해방의 첫걸음으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사노동과 산업노동의 가장 큰 차이는 후자에겐 임금이 주어진다는 것이겠죠. 자본주의사회는 무엇보다 이 중심 되는 사회입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수입원을 가진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가정 내에서의 말빨이 강화되기 마련입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할 때 그 존재라는 외연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 경제와 관련한 입장 또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엥겔스는 여성해방의 첫째 관건은, "여성이 직업을 가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를테면, 결혼 후 남편이 점점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 든든한 자기 수입원이 확보된 여성은 모종의 결단(?)을 쉽게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 노동분업의 한 축(프롤레타리아트) 속에 뛰어들게 됨에 따라 여성은 우물 안 개구리의 의식을 벗어나게 됩니다. 이를테면, 작업장에서 노조에 가입한 동료들에게서 듣는 이야기는 동네 앞 우물가에서 아주머니들에게서 듣던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르겠죠. 전교조가 학교를 바꾼 것도 이런 이치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전교조 이전의 학교는 교장의 왕국이었죠. 교장선생님은 지휘관인 동시에 상전이었습니다. 아무리 몹쓸 짓을 해도 교사가 학교장에게 따지고 드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의 물(?)을 먹은 활동가 교사가 단위학교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점차 교사 대중들이... “저런 방식도 있구나하면서 각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똑 같은 피억압자(파울루 프레이리의 용어법으로)에 해당하는 농민과 산업노동자 가운데 어느 쪽이 진정으로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 파편화된 농민은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에 비해 사회 진보와 관련한 선진된 관점을 가지기 힘든 것입니다.

셋째,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페미니즘이 신장된 점입니다. 봉건제사회만 하더라도 여성해방이니 여성주의(페미니즘)’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겠죠. 집안에서 다소곳하게 처신해야만 하는 여성들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부려먹기 위해서는 여성에 관한 이데올로기의 개조를 필요로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의 의상도 활동하기(일하기) 편한방식으로 바뀔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1851년 블루머(Amelia Bloomer)에 의해 만들어진 블루머 바지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가 바지 입는 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여고생이 퍼머 머리에 양장을 입는 것처럼 금기시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1) 여성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적으로 진출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

2) 지배계급(부르주아)의 이러한 요구에 조응하여 바람직한 여성상에 대한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수정/보급된다는 것.

3) 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근로여성은 이중의 착취를 겪게 되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주체적인 성장과 여성해방을 위한 움직임(페미니즘)이 활발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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