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펌글) "나는 진짜 '노동'도 '사랑'도 못하는 노예입니다"

리틀윙 2010. 5. 1. 09:08

사랑과 노동의 공통 토대


우리의 삶과 열정이 만개한 한 시기를 성찰하자. 그곳에는 노동하는 내가 있고, 사랑하는 내가 있다. 사랑과 노동에는 공통의 토대, 매트릭스가 있다. '관계'가 그것이다.


'성(sex)의 능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경솔한 젊은이의 즉답은 '세 번'이다. 정답은 '관계'이다. 생텍쥐페리에게 사랑은 제3의 것을 바라는 것이다. 1인칭의 나와 2인칭의 네가 공통적인 것을 바라보는 관계, 그것이 사랑이다.


노동의 능력도 '관계'이다. 마르틴 부버는 태초의 관계를 말한다. '튼튼한 이빨도, 두둑한 가죽도 없이 자연 속에서 벌거벗고 있던 연약한 인간의 본래적인 궁핍'은 노동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보호받아야 할 시기는 사자새끼의 몇 십 배이다. 인간은 관계, 노동의 관계의 와중에서만 인간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혼자만 일하겠다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오직 내 일만 하겠다, 다른 사람이 실수하더라도 말없이 고쳐놓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인 듯도 하다. 도급 노동자, 두목 노동자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능력 있고 일의 능률도 높일 수 있는 듯이 보이니까. 그러나 혼자 일하다가 동료와 협력하여 일 할 때의 수월함과 기쁨을 모르도록 조직하는 노동은 비인간적이다.


종교에 비판적인 독자라 해도 도로테 죌레의 '여성 신학', 또는 ‘창조 신학’을 표방하는 외피 때문에 이 책 <사랑과 노동>(박재순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펴냄) 읽는 데 방해 받을 필요는 없다. 저자의 손을 떠난 저서의 이해, 해석, 인식은 항상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비판적으로 긍정하는 저자는 여성으로서 더 나은 삶과 더 인간적으로 조직되는 노동 세계를 모색한다.


소외 :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사회적 상황


타인의 고통을 모르는 병, 감정 상실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있다. '소외'를 낡은 이론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그렇다.


노동자의 질곡을 모르거나, 안다 해도 카펫 밑에 덮어버리는 이론가, 또는 피해자의 입장과 가해자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브레히트의 저주, '곤궁한 자들의 외침에 대해 귀를 막으면 그는 가장 사랑하는 이의 나지막한 목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다. 주어진 역사적 상황의 기본적인 모순이 무엇인가를 밝히지 않으며 변혁의 실천적 담지자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는 사회·경제적 분석은 오류이다.


인간의 생산물과 제도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낯선 세력으로서 인간과 대립하고 있는 역사·사회적인 총체적 상황"으로 정의되는 소외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이윤 추구에 의해 노동이 조직됨으로써 이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실업자가 될 수 있는, 자본주의 제도가 만들어내는 실업은 물론이요, 노동자로서 불만족스러운 환경이나 항상 똑같은, 보람도 없는 일에 매여 있는 사람들 역시 노동에서 소외되어 있다.


노동자로서 내가 누리는 특권이 있다면, 나의 노동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에는 보람도 기쁨도 없다. 산업사회가 버린 가치, '관계'를 중시하는 기존의 가치는 사라지고 대신 들어선 가치는 이윤 창출을 위해 효율성을 극도로 중시한다는 의미의 합리성이요, 이를 토대로 조직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과정 자체가 인간들을 반목시키기 때문에 그런 노동은 우리가 존재해야 하는 공간보다 더 작은 곳에 우리를 가두어놓는다.


헤겔은 주인-노예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이 어떻게 인간을 소외시키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간을 고양시키는지를 이야기했다. 주인이 주인인 이유는 그가 생산 수단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의 노동을 점유한다. 노예는 자신의 생산력으로부터 소외된다. 주인의 지배는 그의 공적이나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필수적인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데 근거한다.


도시 근교의 산에 움막을 짓고 사는 사람, 용역 회사와 일 시키는 사람에 의해 이중의 착취를 당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임금의 10퍼센트를 소개비로 떼이는 용역 회사를 통하여 일하러 갔다. 먹지 못해 힘 쓸 줄 모르는 그에게 주인이 점잖게 충고를 했다. '왜 하필 우리 농장에 왔나. 일 다니지 마라.'


먹지 못하고 따뜻하게 잠자지 못한 움막집 주인이나 노숙자가 힘쓰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용역 회사도, 일 시키는 사람의 말과 행위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용역 회사는 자본을 가지고 운영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요, 자기의 노동력을 사간 고용자는 자신에게 하루 일당을 주기 때문에 그 자신이 그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소박한 마음과는 달리, 함께 일하는 이들로부터도 소외당한다. 이미 빼앗기고 사는 이들에게 힘 못 쓰는 이를 돌볼 아량을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그가 그의 약점을 보완해 줄 좋은 동료를 만나, 지난 겨울을 무사히 넘겼기를 바란다.


임노동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777년, 파리에 갑자기 늘어난 노숙자 문제를 처리할 현상 논문에 당선된 이는,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새로운 연금술을 발견했다. 그것은 임금노동이다.' 거지들을 데려다가 일 시키고 임금을 준다는 요지이다. 이는 종래에 생각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대책인 셈이었다.


그러나 노동을 아무나 할 수 없다. 일하려 하지 않는 이들을 채찍질하는 것은 물론이요, 구덩이를 파, 물이 흘러들어 오도록 하고는 질을 강요시킨다. 펌프질 안한다면 그는 익사해도 무방한 사람이 된다(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


움막집 주인과 노숙자를 일 시키려는 사회의 야망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동시에 끝없이 실업자를 양산하는 정책도 계속되고 있다. 모두 아는 사실이되, 팔뚝에 죽을 자의 표지를 한, 벌목될 나무처럼 검은 띠를 두른 사람(이스마엘 카다레, <부서진 사월>)의 운명처럼, 해고 대상 노동자나 용역 노동자들도 저주받은 운명 같은 노동의 표지를 붙이고 산다.


그리고 정부는 물론, 대자본을 들여 언론 회사를 세웠기 때문에 자본가의 편을 들어야 하는 언론, 자본주의를 역사에서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는 이론가들,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경찰까지도 해고 문제를 제기하는 노동자들의 집회나 시위를 범죄시하거나, 이들의 행위를 공격할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이런 사실은 벌써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얼마 전의 '쌍용자동차' 사태나 최근의 '발레오 공조 코리아' 사태 등, 자본 언론이 다루지 않거나 무시하는 많은 사실들에서 볼 수 있다. 노동하는 사회 조직이, 이윤 추구를 위하여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해도 되는 사회여도 되는가? 아니면 사채 시장의 논리(용역 회사는 바로 이것이다)에 맡겨도 되는가? 노동을 사회의 공적 문제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를 다루지 않는 노동 정책이나 노동 이론, 경제 이론은 가짜이다.


▲ 최근에 종영된 인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은 부잣집에서 식모로 일하며 고된 노동으로 일상을 보내는 주인공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한 축으로 전개해 시청자의 공감을 샀다. ⓒMBC

노동이 소외된 사회에 성(性)도 소외되어 있다. 사랑의 적은 간악한 플레이보이만이 아니다. 교환가치가 우위를 점한 사회에서 성은 소외된다.


자본주의는 생산품의 "교환가치"를 위해서 "사용가치"를 배제함으로써 모든 사물이 점차 교환될 수 있도록 했다. 교환가치와 이윤의 세계에서는 개인들이 원자화되며 서로 고립된다. 노동자들의 진정한 욕구는 이윤 합리적인 노동세계에서 억압되고 침묵되기 때문에 그들의 상호관계는 교환될 수 있는 관계로 전락한다. 돈과 상품의 거래에서는 개인적인 소망, 동기, 그리고 감각들은 소용없다.


교환가치의 의미가 내면화되자, 사랑까지도 교환 가능한 것으로 둔갑하지 않겠는가.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원하는 물품이 나오듯이, 학력과 사회적 이력을 집어넣으면 결혼 상대가 정해지는 현실에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듯이.


결코 같은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 노동에서 사용가치를 사상하고 교환가치로서만 노동력이 임금으로 계산되듯이, 본래 교환될 수 없는 인간들의 욕구까지도 조정될 수 있는 것을 광고에서 볼 수 있다.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포기하도록 하려면 우선 그들을 세뇌시켜야 한다.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말없이 '이것'을 건넸다." '이것'이란 술(고급술, 옮긴이)이다. "'이것'으로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보다 당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란 보석 광고이다. 이 둘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간의 말을 박탈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들의 기본적인 관계(말, 대화)를 없애고, 그 자리에 상품을 집어넣는다.


광고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상품의 생산과 소비로 왜소화시킨다. 여성들은 특히 더 이러한 소비 교육의 희생자이다. 좀 다르게 살고, 보다 아름답고 보다 낫게, 보다 총명하고 행복하게 되려는 우리의 욕구는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욕구로 변형되어야 한다. 이러한 압박은 여성들을 손상시키되, 특히 그들의 성적인 욕구와 관련된 것들을 손상시킨다. 광고는 여성들로 하여금 철든 성인답게 어려움을 무릅쓰고 적절한 파트너를 찾으려는 것보다는 다른 상품들처럼 "가질" 수 있는 남자, 동화속의 왕자에 대한 유치하고 마술적인 표상을 추구하게 한다.


우리의 꿈을 왜곡시키고 우리의 감각을 상품이 만들어내는 황금시장 속에 가두어버리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상품들이 우리들의 실제적인 욕구를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바람은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 교제, 사랑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 의해 자신이) 사용된다는 경험과 느낌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랑의 적들에게 성은 "상품"일 뿐이다. 관계에 대한 욕구는 소비주의로 대체되어, 우리의 감정을 수탈한다. 익명의 성(性)에 대한 꿈은 성을 교환 가능한, 사고 팔 수 있는 객체로 생각하는 상품세계의 꿈이다. 이러한 사교(邪敎)는 인간의 관계가 다차원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사랑과 노동의 네 차원


사랑과 노동에는 네 차원이 있다. 초월성(Extasis)과 신뢰, 총체성과 연대성이 그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성은 우리의 관계의 능력과 관련된다. 그러나 만일 성이 육체적인 성교로 왜소화된다면 관계에로의 전인적 통합은 어려워지며, 나를 벗어나 더 큰 차원의 관계, 엑스타시를 느끼는 정도도 줄어들 것이다. 완전한 성적 관계에 대한 표상, 인간의 오래된 꿈 중의 하나는 우리 존재의 합리적인 층과 비합리적인 층이 서로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초월성은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되, 사랑과 노동에 공통적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원초적 관계를 이야기한다. 유아는 엄마의 젖을 빤다. 그는 자기와 엄마를 어느 순간 한 몸으로 착각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후일, 자기보다 더 큰 울타리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나보다 더 큰 울타리로 들어가는 것. 성의 비밀은 다른 사람을 향해 나아가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을 품에 안으려는 욕구에 있지 않은가? 이것이 성적 관계의 능력이다. 노동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사이의 모든 긴밀한 관계들은 함께 무슨 일을 하려는 욕구를 부각시킨다.


상호 신뢰 역시 인간적인 성에 속하되, 노동의 차원에 속한다. 성적 소비주의 세계에서 신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신뢰할수록 서로 위로하고 서로에게 배울 수 있다. 노동 세계, 그 위계 질서적인 관계 구조에서 약자가 착취당한다. 그러나 신뢰의 관계는 약한 파트너가 착취당하는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엑스타시와 신뢰는 우리 삶의 근본 토대이다.


총체성과 연대성 역시 사랑과 노동에 공통된 것이다. 사랑은 전체가 되는 것이요 다차원적이 되는 것, 우리의 신체적이고 정서적, 심미적, 영적 능력들의 통합이다. 노동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전인적 능력을 쏟아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또한 정의(正義)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의 슬로건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합시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오르가즘의 잠재력, 혹은 성 행위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능력은 진정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과 연대한다는 의미는 그 근거가 우리의 신체적 충동이 그러하다는 점과 인간이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것에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성적 이완을 향한 생물학적 욕구로서의 에페티미아, 사랑받는 존재에 대한 강한 열망의 표현인 에로스, 상호성이나 우정으로서의 필리아, 상호 귀속감과 공동체적 관계로서의 아가페가 그것이다.


억압적 관계, 진정한 인간의 자유와 욕망을 배제하는 세계에서 사랑이나 우정을 바랄 수 없듯이, 소외된 노동의 세계에서 우정을 바랄 수 없다. 그러나 부분적인 일치에 만족할 수 없는 우리는 사랑과 노동의 관계에서 통전성과 연대성을 포기할 수 없다. 우리의 욕구들을 함께 나누고 공동성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좋은 노동은 우리의 삶의 사회적인 관련성을 보여주며, 또 우리 자신과 타인들의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


이 네 차원들은 서로 관계되어 있다. 초월은 연대성에로 이끌어주며, 연대성은 다시 우리의 엑스타시를 강화시키고 우리의 신뢰를 강화시킨다.


희망


환상이 없는 민중은 멸망해 버리고 만다(잠언 29 : 18).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임금(賃金) 노예 제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보다 높은 임금을 위해서만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 노동 자체의 변혁을 위해서, 노동자들이 그들의 생산물의 사용가치를 파악하고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고 작업현장에서 지식을 얻고 넓힐 기회가 있는, 의미 있는 활동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을 바꾸기 위해서 싸웠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부터 노동의 적극적인 의미를 읽어내었다. 인간으로서의, 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 활동은 우리를 개인적인 삶의 표현으로, 인간적인 욕구의 충족으로, 인간의 공동적인 본질의 실현으로 인도한다(마르크스).


자기 창조로서의 노동, 자율적인 노동을 통하여 노예는 주인으로 바뀐다. 좋은 노동은 '이웃에 대한 봉사와 타인들과의 공동적인 노동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를 타고난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사랑과 노동으로 꾸려가야 할 희망은 새롭게 가꾸어야 할 땅이다. 그 땅은 적어도 노동이 자본에 대하여 우위인 세상이다(요한 바오로 2세, <노동하는 인간>)이다.


이런 희망은 모욕을 당하고 권리를 잃은 자들의 투쟁에서 자라난다.


"역사의 뿌리는 노동하고, 창조하고, 주어진 것을 변형시키고 넘어서는 인간이다. 그 인간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그의 소유를 외화와 소외가 없는 현실 민주주의에 세우게 되면 세상에는 그 어떤 것이 등장하게 된다. 그 어떤 것은 모든 인류에게 그의 어린 시절에 언뜻 보였던,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가본 일 없는 고향이다."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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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이재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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