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지난 2003년의 새해에 어느 카페에 올렸던 인사말입니다. 7년 뒤에 다시 읽어보니, 한편으론 부끄러운 측면도 있지만 ‘창의성’이란 차원에선 제법 괜찮은 글이다 싶어 이곳에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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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이란 개념을 오늘 처음으로 생각해봤습니다.
"안녕하십니까"나 "식사 하셨습니까"란 인사말이 그러하듯, '복 많이'라는 인사말도 질곡의 우리 역사가 반영된 일상적 용어법인데, 지금부터 나는 그런 인사말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 정확한 어원은 모르지만, 복이란 말은 그 자체로 ‘개인주의’를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만인이 만인에게 야수가 되어 살아가는 이 잔인한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미덕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한 끼의 맛있는 식사를 할 때, 지구상 어느 그늘진 곳에서 굶는 이가 단 한사람이라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복 받은 사람일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새해 복 많이"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구조적으로 모두가 복 많이 받을 수 없는 세상이라면, 그런 인사말은 조폭이나 재벌끼리처럼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담합의 외교적 수사법에 다름 아니라 생각합니다.
‘복 많이’보다는 다음과 같이 새해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나날이 새로운(日新又日新) 삶이 되도록 열심히 삽시다!
올해(2003)로 이제 내 나이도 마흔이 되었습니다.
마흔이라니, 내 생애 첨으로 모종의 위기의식이 듭니다.
하지만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단, 나이 값 못할까 고민하고 싶습니다.
인간에게 생물학적인 나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첼로의 대가 파블로 카잘스의 전기의 첫페이지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됩니다.
지난번 생일로 나는 93세가 되었다. 물론 젊은 나이는 아니다. 실제로 93세라는 것은 90세보다 늙은 나이이다. 그러나 나이는 상대적인 문제이다.
만일 계속하여 일하면서 주위 세계의 아름다움에 빠져 든다면 사람들은 나이라는 것이 반드시 늙어가는 것만을 뜻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사물에 대하여 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느끼며 나에게 인생은 점점 매혹적이 되고 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장수를 자랑하는 코카서스에 100세 이상의 멤버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있는데, 그곳 리더가 카잘스에게 편지를 보낸 이야기인즉,
"존경하는 카잘스님, 우리 악단 역사상 100세 미만의 지휘자를 둔 적이 없지만, 90세 초반의 당신에게만 예외로 지휘봉을 맡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내가 내 정열을 불싸를 대상이 있는 한,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한,
우리는 영원한 젊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라면, 나는 투쟁이 없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영복선생의 말씀처럼, “사랑은 맹목이 아니라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이가 한가족처럼(하나처럼, liveas1@hanmail.net)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새해에도 우리 모두 분투합시다.
(방금 문장에서 밑줄 친 부분을 “우리 모두 치열하게 삽시다”로 바꾸고 싶습니다.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봅니다. 나이 든 것이 철든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나이듦‘을 기꺼이 환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