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에콜로지

'발전'에 대하여

리틀윙 2009. 6. 16. 20:22

 

현재의 S초는 몇 년 전과 너무나 다르다.

1997년 내가 처음 그곳에 부임해와 근무할 때만 해도, 뒷동산은 모두 판자촌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개발"되었다. 뒷동산을 허물어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들어섰다.

인간에게 정작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발전'이란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옛주인에게서 추억을 앗아가는 한, 발전이 곧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향마을, 내가 뛰놀던 공터(뒷동산), 모교... 이 모든 실체들은 동심으로 상징화되고 동심은 어른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항상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므로, 고향마을이나 모교를 잃는 것은 곧 '마음의 고향'을 잃는 것이다. 댐에 잠긴 마을, 학생수 부족으로 폐교된 초등학교 옆을 지날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발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때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S초의 주변지역이 '개발'되기 전에는 이 학교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별로 기죽지 않고 학교생활을 해갔다. 왜냐하면 대부분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산동네(달동네)의 상당부분이 뜯겨짐에 따라 남은 산동네 지역의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소수화되면서 계층적 위화감과 더불어 소외가 심화된 것이다. 그리고 철거를 당하면서 쫓겨난 아이들은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학가서 거기서 또 소외계층의 학생으로 전락할 것이다.

 

'발전 논리'가 정당화되려면 그것이 모두에게 바람직해야 한다. 20대80 혹은 10대90의 양극화 사회에서 발전으로 인해 한쪽은 풍요를 누리고 다른 한쪽은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심화된다면 후자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발전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다.

IMF이후에 한국사회에서 백만장자의 수는 오히려 증가했다고 한다. 세계 제1의 증가율이라 한다.


 

다음으로, 동식물의 입장에서 '발전'을 논해봐야 한다. 사실, 개발논리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입장은 동식물들이다.

'문명(문화)'과 '야만'의 어원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culture'는 'cultivate(경작하다)'에서 유래한다. 반대로 야만(savage)의 어원은 '숲'을 의미하는 라틴어 'silva'에서 생겨났다.

태초에 유럽의 자연환경은 오늘날의 것과 아주 달랐다. 빽빽한 침엽수림이 지금의 아마존 정글만큼이나 울창한 숲을 이루었는데, 그 속에서 원시유럽인들은 맹수의 밥이 되기 쉬웠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어내어야(cultivate) 했다. 반대로 인위적으로 숲(silva)을 없애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류를 야만인(savage)이라 부르며 문명인들은 이들과 자신을 차별화했다.

보다시피, '개발'은 사실상 '파괴'와 동의어나 다름 없다. 개발은 '자연에 대한 정복'이고 개발논리는 '힘의 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자연과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부류는 '야만'으로 불리고 '힘의 논리'로 자연을 파괴하는 부류는 '문명'이라 하니 잘못이 아닌가. 둘의 개념은 서로 뒤바뀌어야 할 것이다.


1850년 씨애틀 추장은 아래와 같은 연설문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오늘날 어떠한 엘리트 생태주의자도 저런 생각은 품지 못하고 저런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총칼을 앞세워 헐값에 땅을 팔라는 오만한 백인 정부 관리의 요구에 대해, 스스로를 기꺼이 야만인이라 한 이 추장의 연설문은 너무나 심오하고 감동적이어서 절로 머리가 숙어진다. 인디언들은 자기네 땅을 빼앗긴 것 보다 자연의 순리를 모르는 백인들이 자신의 영지를 탐욕으로 물들일 것에 오열했을 것이다. 영용(英勇)한 인디언 전사들이 추한 백인의 무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성지를 내 주기로 마음먹었을 때의 그 심정을 헤아린다면, 눈물샘의 자극 없이 이 글을 읽어내려가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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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대지의 따스한 기운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그런 사고는 우리에게 생소할 뿐이다. 우리는 대기의 신선함이나 강물의 눈부심을 "소유"(강조는 옮긴이)하고 있지 않은데, 당신들은 어떻게 그것들을 우리에게서 사겠단 말인가? 우리 부족에게 이 땅의 모든 것은 신성하다. 반짝이는 솔잎 하나하나, 해변가의 모래알 하나하나, 숲 속의 안개, 초롱초롱한 울음소리를 내는 벌레 하나하나가 다 우리 부족의 추억과 경험 속에 신성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백인들은 자신의 영혼이 하늘의 별 속으로 날아 갈 때 자신을 낳아준 땅을 잊고 떠나지만, 우리 부족은 이 아름다운 땅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 부족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향기로운 꽃들은 우리의 누이이고; 사슴, 말, 위대한 독수리, 이것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틈새로 흐르는 물, 목초의 즙, 조랑말의 체온, 그리고 인간 - 이 모든 피조물들은 다 한가족이다.

백인의 큰 추장(Great Chief in Washington)은 우리 땅을 사겠다는 말을 전하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큰 추장은 이 땅을 보호구역(reservation)으로 만들어 그 속에서 우리들이 살도록 해주겠다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된다. 따라서, 나는 당신의 제안을 우리더러 이 땅을 팔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개울에서 강으로 흐르는 이 영롱한 물줄기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핏줄이다. 만약 우리가 당신들에게 땅을 판다면, 당신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 후손들에게 이 땅이 성지이며 호수의 물방울 하나하나에 깃든 영혼들이 우리 부족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과 추억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물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이다.

우리는 백인이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다. 백인에겐 이 땅이나 저 땅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백인은 땅을 소유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뜻, 옮긴이). 그는 낯선 사람처럼 밤에 다가와 이 땅에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앗아간다. 백인에게 땅은 형제가 아니라 적이어서, 그는 땅을 정복하고 나면 곧 옮기고 만다. 자신이 돌보아야할 아버지의 무덤을 뒤로한 채 땅을 떠나버린다. 백인은 자신의 어머니인 땅과 자신의 형제인 하늘을 양떼나 곡식처럼 매매와 약탈의 대상으로 여긴다. 백인은 땅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나서 황무지가 되면 버리고 떠난다.

우리의 방식이 당신의 것과 다른지는 모른다. 당신네 도시 풍경은 우리 홍인종의 눈을 아프게 한다. 아마도 야만인인 우리가 당신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백인의 도시엔 고요한 곳이라곤 없다. 그곳에선 봄 잎이 기지개를 펴는 소리나 곤충이 날개짓 하는 소리를 엿들을 수가 없다. 아마 내가 야만인이라서 당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보다. 덜거덕거리는 소리는 내 귀를 모독하는 것만 같다. 밤 연못가에서 쏙독새의 구슬픈 울음소리나 개구리들이 서로 시샘하는 소리를 엿들을 수 없는 인간에게 도대체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붉은 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라서 이해하지 못한다. 인디언들은 수면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나 한낮에 내린 비로 깨끗해진 자연 바람의 내음을 더 좋아한다.

......

자, 우리 더러 땅을 팔라고 하는데, 한가지 조건이 있다: 백인들은 이 땅의 생명체들을 형제처럼 대해야만 한다. 나는 야만인이라서 다른 방식은 모른다. 나는 백인들이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쏜 총에 맞아 쓰러진 수 천 마리 물소들의 시체가 썩고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야만인이라서 그 불뿜는 쇠붙이 말(철마, train ; 옮긴이)이 우리는 오직 생존을 위해서만 죽일 뿐인 물소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들짐승이 없다면 인간도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모든 들짐승들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영혼의 고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 것이다. 짐승들에게 닥친 운명은 곧 인간에게도 닥칠 것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당신들은 후손들에게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이 당신들 선조들의 영혼이라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그들도 이 땅을 존중할 것이다. 또한, 후손들에게 이 땅이 우리 종족의 목숨을 대가로 더욱 풍요해졌다는 사실을 일러주기 바란다. 당신의 후손들에게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땅은 어머니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기 바란다. 땅과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 땅의 자식이다. 만약 인간이 땅을 향해 침을 뱉으면, 땅도 우리에게 침을 뱉을 것이다. 땅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안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은 연관을 맺고 있다. 땅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면 어떤 것들도 땅의 자식들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현대적 의미로 생태계를 말하는 것 같음, 역주)을 자신이 잣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다만 그 속의 한 올에 불과하다. 그 속에서 인간은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백인이라 할지라도 이 보편 법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결국 형제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한가지, 아마 언젠가는 당신들도 알게 될 사실은 우리 둘의 신이 같은 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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