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의식

존재와 의식 - 인식론에서 가장 중요한 접근틀

리틀윙 2009. 4. 6. 21:16

철학은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어집니다.

 -> 존재론(ontology), 인식론(ephistemology), 가치론(axiology)


존재론은 이 세계를 이루는 근본이 무엇인가, 이 세계의 만물이 어떤 이치로 돌아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 나오는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가 이 세상의 근원(아르케, arche)을 각각 '물', '불', '수(숫자)' 등으로 설명하는 것이 존재론과 관계있습니다.

가치론의 하위 영역으로는 윤리학과 미학이 있습니다.

인식론은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인간의 사고(관념)에 관한 문제들, 즉 관념의 원천, 관념이 현실을 반영하는 방식, 관념이 검증되고 발전되는 방식, 사회 속에서 관념이 기능하는 역할 등의 문제를 취급합니다.


벌써 머리가 아파지려 하죠. ^^

가급적 ‘먹물’을 배제하고 보다 쉽게 전해드리는 것이 나의 임무입니다.


복잡한 인식론의 문제에 있어, 거두절미하고 단 하나의 접근틀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 하나의 명제가 철학의 본질을 좌우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많은 의문들이 이 하나의 접근틀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 꼭 기억해야 할 하나의 명제 =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이 문장을 처음 접하는 분은, 도대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제가 게재할 글들을 관심 있게 읽으시면 분명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1) 무명 시절에 아주 좋은 뮤지션이나 연예인이 유명세를 타면서부터 "사람이 확 달라지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봅니다. 비슷한 이치로, 학교에 근무하는 제가 쉽게 경험하는 예를 들면, 평교사 시절에는 매우 좋은 선생님이었는데 교감으로 승진하고 나서는 “사람이 확 달라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2)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민중들을 향해 철없는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되잖아”


3) 요즘 쌍용자동차의 경우처럼 노사분규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관점을 피력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가 어떤 견해를 가질 것인가에 대해 예측을 못하지만, 회사측의 고위간부의 경우라면 99.9%가 노동자의 집단행동에 대해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로 설명이 됩니다.


1)의 경우에서 보듯, 한 인간의 존재양식이 달라지면 그의 의식도 저절로 달라집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속담이 이를 말해줍니다.

또한, 자신의 존재 조건이 격상됨에 따라 교만해진다거나 하는 인간성(?)의 변화도 변화지만, 무엇보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출세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예전에 자기도 그런 신세였을 때는 “세상을 탓하였는데” 이제는 사람을 탓하게 됩니다. 즉, 자기만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무명 신세를 벗어날 수 있는데 “그들이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그렇다”는 식의 관점을 갖기 쉽습니다.


2) 마리 앙뜨와네뜨가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영화나 책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앙뜨와네뜨는 철이 없을지언정 그렇게 악한 인품의 소유자는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아는 삶이라곤 궁전에서의 삶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궁전 밖에서 사람들의 ‘존재양식’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에... 자신은 “진심으로” “빵을 달라”고 외치는 민중들의 절규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존재양식이 잘못되면 사람이 무식해집니다. 그리고 무식한 인간은 반드시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앙뜨와네뜨와 비슷한 출신성분이었지만 싯타르타는 그 “존재조건”을 스스로 혁명적으로 개조하기 위해 궁궐을 박차고 나가 굶어 죽어가는 민중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면서 자신도 고행을 길을 걸음으로써 비로소 자기 나름의 ‘진리’를 깨우쳤던 것입니다.


3) “입장이 다르면 생각이나 느낌도 다릅니다”

예술을 하는 여러분들이 이 말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였던 것은 자신의 그림이 팔리지 않아서였습니다. 고흐의 전기를 담은 영화를 보면 동생 테오도르 고흐가 화랑에 근무하면서 형의 그림을 팔아주기 위해 고객들에게 위와 같은 그림을 내놓는데, 그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부르주아 손님들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뭐 이런 이상한 그림을 내게 권하냐” 하는 식이죠.

위의 작품은 유명한 [감자 먹는 사람들]인데, 빈센트는 이 그림을 통해 “희미한 등잔 아래에서 감자를 향해 내미는 손은 대지를 경작한 거친 손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예수의 말씀이 연상되는 훌륭한 메시지죠.


그러나, 부르주아들에게 위의 그림은 정서적으로 불편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객관적으로 예술성도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즉, 동시대의 화가 세잔느처럼 정물화나 그리지 왜 저렇게 칙칙한 그림을 그리느냐고 불평하겠죠.

입장이 다르면 생각이나 느낌도 다릅니다. 한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입장(존재양식)입니다.


물론, 존재양식이 바뀌어도 예전의 의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문에 위의 명제는 절대적으로 그러하다고 고지식하게 신봉해서는 곤란합니다.


1)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이 당연히 아닙니다. ‘보편적으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라 할지라도... 부르주아적인 존재가 자신의 계급적 의식을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리 앙뜨와네뜨 수준은 아닐지라도 그가 가난한 이웃을 이해하고 돕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경우처럼 자신의 존재조건을 혁명적으로 바꿔 자신의 성분을 개조하지 않는 한 그러합니다. 그래서 신영복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 맞는 사람을 돕는 최선은, 우산을 나눠 쓰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버리고 같이 비를 맞는 것이다”


2)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일방적으로 그러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를테면, 존재의 양식은 변함없는데, 어떤 계기를 통해 의식이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서를 통한 깨달음이나 고아원 같은 곳에서 ‘체험학습’을 통해 의식의 전환을 이루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일회성의 체험학습은 아침에 자고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면서 대개 원래의 의식으로 복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남의 집 아이의 큰 불행(=의식)이 내 집 아이의 작은 불행(=존재)과 상호충돌할 때 전자가 후자를 “규정”하기보다는 그 역인 것입니다.


존재가 의식을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규정한다면, 존재조건이 서로 다른 사람끼리 어떠한 교감이나 연대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네 삶이, 이 세상이 너무 삭막하겠죠. 석가모니처럼 자신의 존재조건을 혁명적으로 개조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의식을 혁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부단한 사색과 성찰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런 뼈를 깎는 노력이 없이는 '강부자'는 죽을 때까지 인간이 되기 어렵습니다.

  


어떤 경우든 존재가 의식에 대해 선차적(우선적)이며 또한 결정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 감을 대충 잡으셨겠지만, 이 명제에서 ‘존재’라 함은 주로 물질적 조건(=경제적 조건)을 말하고, ‘의식’이라 함은 한 인간의 세계관이나 사고방식, 정서, 흥미를 비롯하여 폭넓게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는, '의식'과 '물질' 가운데 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라는 철학적 유물론의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철학사는 물질과 의식 가운데 어느 것이 선차적(우선적)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 발전해왔습니다. 따라서 "유물이냐 관념이냐" 하는 문제는 철학공부의 전부라 해도 지나지치 않을 것입니다. "물질이 먼저다. 물질적인 부분이 보다 중요하다"는 관점을 '유물론(materialism)'이라 하고, 물질보다 정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관념론(idealism)'이라 합니다.


여기서, 유념하셔야 할 것을 적어 둡니다.


첫째, 유물론에서 한자어 '유(唯)'는 '오직'이란 뜻이죠. 그래서 유물론자는 "오직 물질"만 강조한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유물이든 관념이든 "오직"의 의미는 아닙니다. "보다 우선적인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 진정한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에 해당하는 부분(의지, 정신 등)을 결코 경시하지 않는다.


둘째, 존재와 의식, 물질과 관념의 문제를 각각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상호연관의 관점이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대립적인 두 요소를 각각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의 의미로 이해하는 방식이 ‘변증법적 사고’입니다.

-> 존재-의식, 정신-물질, 이론-실천, 이성-감성, 보편-특수, 우연-필연, 부분-전체, 주변-중심, 삶-공부, 사랑-분노 등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습니다.

(붉은색 부분은 얼핏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겁니다.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시작이 반입니다. 늘 처음이 어렵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면 전적으로 내게 잘못이 큽니다. 그러나 어떠한 글도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경우 여러 번 많이 읽을수록 더 많이 이해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례들을 엮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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