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살이-2

자유, 자기의 이유로 살아가기

리틀윙 2021. 1. 27. 13:26

방학하기 며칠 전에 교직원 회의가 소집되었다. 내년도 예산안을 검토하기 위함이다. 며칠 전에도 두 번의 미팅(회의)이 있었기에 회의에 대한 교사들의 회의감이 증폭되었다. 이 두 번의 미팅은 행정실장 때문이었다. 한 번은 2년 동안 이 학교에서 함께한 기존 실장과 이별의 정을 나누기 위한 자리였고 다른 한 번은 새로 부임한 실장과 상견례를 하기 위한 자리였다.

 

행정실장과의 이별과 환영을 위한 두 번의 회의 소집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고 또 불과 10여 분만에 끝났기 때문에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예산안 문제로 1시간 넘게 회의를 여는 것은 교사들이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전체 교사들이 한 명씩 앞에 나와 자신이 맡은 업무와 관련된 예산 편성 내역을 브리핑하고 동료 교사들의 질문이나 의견을 주고받는 형식이었다. 회의 마치고 헤어질 때 동료 교사들의 표정이 궁금했다. 모르긴 해도 많은 분들의 얼굴에서 ‘이런 회의 왜 하나?’ 하는 느낌이 읽혀졌다.

 

회의석상에서 내게 발언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다.

교직생활 33년 동안 예산안 문제로 전체 교사가 모여 회의를 여는 것을 처음 본다. 마찬가지로, 학교 일로 모든 교사가 한 사람씩 앞에 나와서 약간이라도 “자신의 말”을 하는 모습도 처음 본다. 나는, 전자의 이유로 선생님들의 불만이 이해가 되지만 후자의 이유로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교장선생님의 결단에 호감을 품게 된다.

 

회의 끝나고 두 후배 선생님과 교장실을 찾아 커피를 얻어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후배 선생님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동시에 교장선생님의 신선한 제안에 호응할 겸 위와 같은 취지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제안 배경에 관해서도 소상히 듣고 싶었다. 교장선생님은, 전체 교사가 자신이 맡은 업무를 의욕적으로 추진함에 있어 혹 예산 증액을 요구하고 싶으면 자유롭게 제안을 하고 관리자를 포함한 동료교사들은 같이 머리 맞대고 고민하며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숙의(熟議) 과정으로서의 회의를 의도했다고 설명하셨다.

 

공직사회든 사기업이든 모든 집단에서 예산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요컨대, 돈을 효율적으로 잘 쓰는 집단은 건강한 집단이고 돈을 이상하게 쓰는 집단은 수상한 집단이다. 그리고 내 돈이 아니라고 해서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돈이 어떻게 쓰이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것은 물론 불의에 편승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구시대의 학교장은 가급적 교사들이 학교 예산에 무관심하기를 바랬다. 나는 우리 교사들이 이런 회의에 불편 혹은 불만을 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즉, 지금까지 불순한 관리자에 의해 예산 문제에 교사가 소외되고, 교사는 또 이것을 “편의”로 누려온 것이다.

 

올해 우리 학교처럼 전체 교사가 머리를 맞대고 예산안 문제를 고민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 것이고 대부분은 각자 전년도 자기 업무 예산을 그대로 내거나 살짝 고쳐 행정실에 따로따로 제출하는 식일 것이다. 유념할 것은, 지금은 이렇게 대충으로라도 교사들이 자기 업무 예산안을 편성해서 제출하지만, 예전에는 교사들이 예산안 편성에서 아예 배제되었던 점이다. 한 10여 년 전쯤인가 처음으로 학년말에 전체 교사들에게 자기 업무 예산안을 편성해서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모두들 귀찮아했다.

 

사람은 누구나 기존의 익숙한 방식대로 살려는 습성이 있다. 시쳇말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게 제일 편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머리를 짜내 생산적인 무엇을 구상하는 일을 힘들어 한다. 타율적으로 사는 게 편하고 자율성이 주어졌을 때 불편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노예의 삶”이다.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살아가는 것”이다(오늘 5주기를 맞은 고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다). 자기가 맡은 업무에 관해서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어떤 사업에 얼마만큼의 돈을 쓸 것인지에 관한 자기의 이유를 품어야 한다. 학생들의 행복을 생각하며 자기 사업 예산을 좀 더 풍족하게 가져가고픈 욕심을 내야 한다. 그게 ‘자기의 이유’다. 학생의 성장과 행복을 중심에 두고 자기의 이유를 품는 교사가 자유인이다.

 

교장선생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 채 우리 모두는 저마다 얼떨결에 앞에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자기 이야기를 풀어냈다. 앞자리에 앉은 탓에 어떤 젊은 선생님이 발제하면서 손을 바르르 떠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내가 그 분만큼 젊었다면 더 많이 떨었을 것이다. 자유는 언제나 긴장과 떨림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 떨림만큼 개인과 집단이 성장하고 발전한다.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