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시민에게

기독교와 사회주의

리틀윙 2020. 9. 17. 16:32

이 두 사람(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은 같은 길을 여행하며, 두 교리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발견함으로써 종국에는 같은 산봉우리에서 여정을 마칠 것이다.

-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뎅

 

진정한 크리스천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우리 시대의 참 기독교인이다.

-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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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4년 내내 학교 앞 대포집과 당구장을 전전하다가 4학년 2학기에 문득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이 찾아들었다. 난생 처음으로 인간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걸음은 성서를 탐독한 것이다. 성경 속에는 좋은 말이 너무 많았고 그때 새겨둔 금언들은 지금까지도 내 삶과 교직생활에서 철학적 자양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성경에 관심을 품으니 자연스레 주변의 크리스천 친구들의 권유로 교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성경에 빠져들 때와 달리 교회에 나가면서 현실 속의 기독교 문화에 심각한 회의와 염증을 느껴 기독교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 교회를 뒤로 하고 새로 찾은 영혼의 안식처는 마르크스주의였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어렵지만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성경 못지않게 따뜻하고 감동적이었다. 일견 매우 이질적이고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상체계는 지향하는 바도 비슷하고 공통점도 많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적 요소만 빼면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공동체주의와 닮은꼴이라고 생각한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 (마태 23:8)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 22:39)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그 옷을 돌려주어라. (출 22:26)

그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고 가진 것을 이웃들과 기꺼이 나누도록 해라. (딤전 6:18)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누 3:11)

 

성경 말씀 가운데 우리의 속물근성에 각성을 촉구하는 금언들은 하나같이 “더불어 삶”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가치관은 사회주의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상과 일치한다. 체 게바라가 꿈 꿨던 새로운 인간(New man)이 위의 성경 구절에서 요구하는 덕목의 소유자일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대립물인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더욱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1%를 위한 사회체제다. 1%가 99%를 향한 탐욕과 착취, 억압을 근간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사회야말로 적그리스도의 표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 집필에 몰두하고 있을 때 영국 런던에서 20세의 여공이 과로로 사망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은 귀족들이 입을 드레스를 만드는 일을 하였는데 사교계 성수기에는 30시간을 연속으로 일했다. 30명이 필요 산소 용적의 1/3밖에 안 되는 방에서 26시간 30분을 쉬지 않고 일하다가 한 여공이 사망한 것이다. 이에 그녀의 고용주가 경악했는데, 그 이유는 덴마크에서 시집 온 새 황태자비를 맞이하는 축하무도회를 앞둔 시점에서 드레스 제작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사회는 한마디로 인간의 가치가 자본의 가치에 질식당하는 사회다. 마르크스 시대에 있었던 위의 풍경은 1970년 전태일의 청계피복공장의 근로환경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 구의역이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죽어간 청년 노동자들의 사망 사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건만(마태 6:24), 이미 천문학적인 부를 획득한 자본가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맘몬신 섬기기에 여념이 없다.

 

그밖에,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 “부자가 천당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힘들 것”(마태 19:24)이라 한 말씀에서도 기독교의 정신이 자본주의와는 대립적이고 사회주의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철저히 친자본주의적이며 반대로 사회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극도의 혐오와 반감을 품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8.15 집회 이후 사랑제일교회 교인 가운데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급기야 자신도 확진자로 판명되었을 때 전광훈 목사는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을 “북한 소행”으로 돌렸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유독 한국사회에서 개신교가 맹목적으로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데에는 그 필연적인 역사적 인과관계가 자리하고 있으니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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