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인의 영화 이야기

결혼에 집착하는 한 여성의 회복적 삶을 그린 영화 [뮤리엘의 웨딩]

리틀윙 2020. 8. 21. 20:37

뮤리엘의 웨딩 Muriel’s Wedding(1994)

 

이 영화는 감독(P.J. 호건)과 출연진이 모두 호주 출신이고 촬영 장소도 대부분 호주가 무대인 호주 영화다. 이렇다 할 스타 배우 하나 등장하지 않는 청초한 작품이지만,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은 볼거리와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 그리고 인간 내면에 대한 나름의 진지한 성찰적 요소까지 품고 있는 수작이다.

 

올드팝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이 영화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갈진대, 영화 곳곳에 아바(ABBA) 음악이 배치되어 아련한 청소년기의 추억에 빠져들게 된다. 아바 음악을 빼놓고 이 영화를 생각할 수 없다. 음악적 요소 외에 플롯 구성 면에서도 아바 음악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아바 음악을 중심으로 이 영화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1. 부케

 

이 영화는 총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장면에 키워드를 제시함으로써 단락을 명시적으로 구분하는 창의적 기법으로 진행해간다. 각 단락의 첫 화면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다. 하늘에서 부케가 날아오면서 주인공 뮤리엘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날아오는 부케를 신부의 친구들이 서로 잡으려고 아우성을 지르는데 결국 뮤리엘의 손에 잡힌다. 신부와 친구들은 뮤리엘과 같은 고교를 다녔고 모두 날라리들이다. 뮤리엘은 이 집단에 발을 넣고 싶어 하지만 못 생기고 뚱뚱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못된 날라리 친구들은 결혼도 못할 주제에 부케를 받았다며 뮤리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결혼은 뮤리엘이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하고 싶어 하는 지상과업이다. 뮤리엘에게 웨딩드레스는 로망 그 자체이며 그녀의 꿈은 결혼할 수 있는여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 방 벽면에 절반은 웨딩드레스 입은 여성의 사진이고 나머지 절반은 아바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 길을 걷다가 웨딩 숍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쇼윈도 앞에서 한참을 구경하는가 하면 때로는 들어가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촬영하기도 한다. 뮤리엘이 결혼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져들 때마다 깔리는 배경음악이 댄싱퀸Dancing Queen’이다.

 

아바를 대표하는 명곡 댄싱퀸은 이 영화의 플롯을 관통하는 주제 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이 음악은 영화 곳곳에 나오는데, 오리지널 아바의 음악 외에 영화를 위해 특별히 어레인지 한 음악으로도 배치되고 있다. 댄싱퀸이 맨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뮤리엘이 혼자 방에 있을 때인데, 코러스(후렴) 부분의 가사 “See that girl. Watch that scene... 저 여자를 보세요. 그녀의 모습에 주목하세요가 흐를 때 카메라가 벽면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사진을 비춘다. 이 카메라 시선은 이 영화 전반에 걸쳐 있는 뮤리엘의 욕망을 대변한다. 클럽 플로어에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댄싱퀸은 결혼식장의 주인공 신부의 메타포인 것이다. 뮤리엘에게는 결혼하는 여성이 여왕이다.

 

 

결혼식을 올린 날라리 신부는 첫날밤에 신랑과 다투고 홧김에 친구들과 하비코스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뮤리엘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날라리들은 우리는 너와 다르다. 네 수준에 맞는 친구들을 찾으라며 주저앉힌다. 하지만 뮤리엘은 아버지가 맡긴 백지수표를 들고 섬으로 날아간다. 뮤리엘에게 못되게 구는 친구들도 너무하지만 그렇게 싫다는 친구들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뮤리엘도 딱할 따름이다. 웨딩드레스와 마찬가지로 이 날라리 집단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심리기제 속엔 뮤리엘의 낮은 자존감이 투영되어 있다.

 

 

 

섬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장기자랑 대회에 참가한 날라리들이 블론디Blondie‘The Tide Is High’를 부르며 춤을 추고 객석의 남성들이 환호한다. 이 곡은 레게의 나라 자메이카에서 1967년에 만들어진 음악인데, 블론디가 1980년에 리메이크하여 대히트를 쳤다. 영화가 만들어진 90년대 초반에 전 세계적으로 레게 열풍이 일었던 점이나 자메이카와 비슷한 정취의 열대 섬을 배경으로 하는 점에서 절묘한 선곡으로 보인다.

 

공연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던 날라리 중 하나가 건너편에 무엇을 보고선 비명을 내지른다. 뮤리엘이 나타난 것이다. 일행은 뮤리엘에게 다가가 술잔을 얼굴에 퍼부으며 악담을 퍼붓는다. , 가련한 우리의 주인공이여!

 

하지만 뮤리엘은 이 휴양지에서 고교 동창 론다를 만나면서 일대 변신을 꾀해간다. 론다는 고교시절 날라리 집단으로부터 왕따를 당했던 점에서 뮤리엘과 동병상련을 느껴 쉽게 친해진다. 론다의 삶도 늘 혼자였다. 다만 뮤리엘과 달리 자의식이 강하고 한 미모 하는 날라리이자, 못된 날라리들과 달리 의리 있고 인간성이 좋은 날라리이다. 론다도 뮤리엘도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지질한 날라리와 인간성 좋은 날라리가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장기자랑 무대에서 아바의 워털루를 공연하여 못된 날라리들보다 훨씬 큰 호응을 얻는다. 이들의 공연 도중 객석에서 못된 날라리 집단에 분규가 일어나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까지 하니 두 모태솔로들이 의기투합하여 자기 생애 최악의 앙숙들에게 멋진 복수극을 펼친 것이다.

 

좋은 영화는 볼거리와 생각거리, 흥미와 감동이라는 이질적인 두 요소를 동시에 품고 있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오락적 요소가 가장 빛을 발하는 지점이 이 워털루 씬이 아닌가 싶다. 장기자랑은 오리지널 음악에 맞춰 출연자들이 립싱크 노래와 율동을 하는 콘셉트인데 감독은 러닝타임이 3분 가까이 되는 이 곡을 통째로 필름에 담았으니 흡사 뮤직비디오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다. 그러려면 흥미를 유지하기 위해 편집상의 전략이 요구된다. 노래 중간에 날라리들의 격투 씬을 양념으로 배치한 것도 이런 일환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의 개인기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두 사람의 의상이나 안무를 보면 아바의 듀엣 보컬 프리다와 아그네싸를 빼다 박았다. 내가 볼 때 감독은 이 씬에 각별한 공을 들였고 두 배우는 혼신의 노력으로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여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풀밭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노래 페르난도를 부른다. 이 곡의 노랫말은 오리지널 스웨덴어 버전과 우리가 아는 영어 버전이 완전히 다르다. 원곡의 노랫말은 아바의 매니저가 썼는데, 페르난도는 아바 멤버들이 자주 가는 술집의 바텐더로서 실연당한 이 남자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영어 버전에서 페르난도는 텍사스 땅을 놓고 미국과 벌인 전쟁에 참전한 멕시코의 전사 이름이다(못된 날라리들보다 백만 배 더 나쁜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텍사스 땅은 물론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아리조나를 비롯한 현 미국 남부의 땅 일대를 갈취했다). 이 전쟁에 참전한 두 퇴역군인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는 노랫말은, 방금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끝낸 뒤 돈독한 우정을 다지는 두 전사의 따뜻한 정서와 잘 어울린다. 아바의 음악들은 틴에이지 청소년들의 성적 일탈을 조장하는 유치한 사랑 타령 일변도인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이 노래만큼은 참으로 아름답다. 영화에서도 나는 이 장면에 특별히 애정을 품는다. 이 장면을 보다 심도 있게 다룰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자면 앞의 워털루 씬이 희석되기 때문에 이 정도로 처리했을 것 같다.

(영화에서 노랫말의 중요한 부분에서 번역이 잘못되었다. “If I had to do the same again, I would, my friend Fernando”친구여, 내가 만약 똑같은 상황에 다시 처해지더라도 기꺼이 그럴 것이네로 옮겨야 한다. 이 말은 미국과의 전쟁이 다시 벌어져서 참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패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전장으로 향할 것이라는 의미다.)

 

 

하비코스에서의 꿈같은 나날 뒤에는 끔찍한 현실이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뮤리엘의 아버지는 주지사 선거에서 간발의 차이로 낙선한 지방 의원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주지사가 못 된 것은 못난 가족들 탓이라 생각한다. 잘난 아버지에게 가족들은 한 낱말로 표상된다. Useless쓸모없는 것들! 적어도 아버지의 백지수표를 들고 흥청망청 외유하는 뮤리엘에게 이 말은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과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에게는 아니다.

 

 

 

#2. 시드니, 신부의 도시

 

두 번째 단락에서는 중대한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는 뮤리엘의 늦깎이 평생지기 로나가 하반신 불구가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뮤리엘이 결혼을 하는 것이다. 포포이즈스핏이라는 촌동네를 떠나 시드니에 오니 뮤리엘에게 신나는 일이 생겨난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에게 대쉬해오는 남친이 생기는가 하면 길거리에는 근사한 웨딩숍이 자신의 병적인 결혼 욕구를 더욱 부채질한다. 급기야 뮤리엘은 이름조차 마리엘로 개명한 뒤 댄싱퀸 아니 웨딩퀸의 반열에 오른다(뮤리엘의 첫음절 mu-ma-로 바꾼 것은 marriage결혼 의지를 강조한 개명으로 보인다). 마리엘의 결혼 상대는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남아공에서 망명한 수영선수다. 남자는 호주 국적을 얻기 위해 신부가 필요했고 마리엘은 결혼할 남자가 필요했으니, 묻지마 식 정략결혼이다.

 

 

#3. 마리엘의 결혼

 

마리엘의 결혼식장에서 벌어지는 몇몇 역설적인 해프닝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망명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의 결혼식을 언론에서 특종을 다루니 지금까지 뮤리엘을 벌레 취급하던 나쁜 날라리들이 메스컴을 타기 위해 신부의 절친 행세를 하는 것이 우습다. 반면, 마리엘의 진정한 벗 론다는 휠체어에 몸을 얹은 채 결혼식장의 구석에서 마리엘을 지켜본다. 또 다른 역설은 신부의 친어머니 대신 아버지의 내연녀가 신부 어머니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씬에서 주목할 것은 이 날의 주인공 웨딩퀸이 입장할 때 흐르는 음악이다. 아바의 발라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곡 ‘I Do I Do I Do’가 위풍당당하게 울려 퍼진다. “Love me or leave me, make your choice. But believe me, I love you, I do I do I do I do I do... 나를 사랑하든지 버리든지 마음대로 하시되 이것만은 믿어주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고말고요.” 문맥상 ‘do’는 앞의 동사 love를 강조하는 용법으로 이해된다. 결혼식에서 주례가 신랑신부에게 검은 머리 파뿌리 어쩌구 할 때까지 배우자를 사랑하겠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I do’인 점을 생각할 때 이 곡 선정 또한 기지가 엿보인다. 덧붙여, ‘I do’라는 대답을 신랑은 한참 늦게 억지로 하는 데 반해 마리엘은 너무 씩씩하게 말하는 장면이 씁쓸한 웃음을 유발한다.

 

 

 

 

위장 결혼 생활이 행복할 수 없다. 부부가 각방을 쓰면서 벌이는 이들의 결혼은 남자에게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만 유효할 뿐이다. 선택은 둘 중 하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라 한다. 인간사에서 얻는 것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마리엘이 결혼을 선택함으로써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평생지기가 버려졌다. 그리고 뮤리엘에서 마리엘로 개명할 때 예견된 바지만 우리 주인공은 자아를 잃었다. 안 그래도 반쪽뿐인 자기 영혼이 완전히 버려진 것이다.

 

하지만 마리엘이 잃은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어머니를 잃는다. 남편의 불륜녀에게 자기 자리를 빼앗긴 채 실의에 빠진 어머니, 딸에게 줄 선물을 들고 있는 어머니를 신부는 퇴장할 때 못 본 체 그냥 지나친다. 딸을 향해 함박웃음 짓던 어머니의 표정이 이내 초라하게 바뀌는 모습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여성에게 결혼은 무엇인가?

 

 

 

한 평생을 한심한 자식들과 잘난 남편 뒷바라지에 고생한 착한 어머니는 수면제를 먹고 모든 짐을 내려놓는다(주된 이유는 남편 탓). 그런데 뻔뻔스러운 남편은 수완을 발휘해 망자의 사인을 자살이 아닌 심장마비로 돌리고선 세인의 동정을 유발하여 뇌물수수죄로 수세에 몰린 자신의 위기 타개 책략으로 활용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난생 처음으로 ‘인간 삶’에 대한 의미 있는 통찰을 길어 올린다. 아버지를 통해 자신 또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놓치고 껍데기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얼음같이 차갑던 남편의 태도가 변한다. 두 사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의미한 신체적 정신적 접속을 꾀한다. 근사한 가짜 남편이 진심으로 다가왔지만 뮤리엘은 결혼반지를 내려놓으며 쿨하게 이별을 선언한다. 마리엘에서 뮤리엘로, 그것도 예와 완전히 다른 모습의 뮤리엘, 진정한 자아를 찾은 뮤리엘로 돌아온 것이다.

 

뮤리엘이 론다의 휠체어를 밀며 두 사람은 고향을 떠나 다시 시드니로 향한다. 두 사람을 태운 택시가 포포이즈 스핏을 벗어나는 장면을 끝으로 이 멋진 영화도 관객에게 이별을 고한다. 관광객들은 이 고장이 그립겠지만 이 글의 독자는 이 영화가 그리울 것이다^^

 

 

#4. 후기

 

 

 

이 영화는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여 낮은 자존감 속에 망가진 삶을 살아가는 한 여성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회복적 삶에 관한 이야기다.

 

무릇 삶이란 자아를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지 못한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내던져진 삶, 피투적 삶을 산다. 뮤리엘의 예를 들면, 뚱뚱하다는 이유로 사람대접 못 받는 이상한 사회에 던져진 것이다. 이 이상한 사회적 준거는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폭력적으로 강제된 것이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람의 가치가 제멋대로 재단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이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개인의 삶은 허구적 준거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자아를 버리고 허영과 위선을 좇게 된다. 이것은 소외된삶이다. 마르크스의 용어 소외(alienation)는 본래의 자신과 멀어져가는 낯설고 괴물 같은(에일리언) 존재 방식을 뜻한다.

 

진정한 삶은 소외된 자신,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기 위한 자기 투쟁으로 경주되어야 한다. 요컨대, 모든 삶은 회복적 삶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런저런 뮤리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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