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인의 영화 이야기

나홍진 감독의 영화

리틀윙 2017. 2. 26. 21:32

<나홍진 감독의 영화>

 

영화 [곡성]에 대한 평론가들의 찬사가 쇄도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뭐라 떠들건 나는 이 영화를 좋게 보지 않는다. 영화전문가가 아닌 나의 평론과 전문가들의 평론이 다르면 그들의 관점이 더 정통하다 하겠지만, 내가 영화의 가치를 매기는 나름의 접근틀이 있다. 그것은 사실성과 당파성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곡성]은 장르상 엑소시즘에 기반한 호러물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현실성과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개연성이나 인과성이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 구성이 너무 조잡하다.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지난 글에서 썼기에 이 글에서는 당파성에 집중하고자 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결국 사람에 대한 서사구조라 할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화 the ensemble of social relationship”이라 하듯이, 인간의 실존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특징지어지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인간은 딱 두 부류로 요약된다. 단언컨대, 이 외에는 없다. 그것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환원된다. 마르크스의 용법으로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프레이리의 개념으로는 억압자와 피억압자... 뭐 이런 무거운 용어들에 거부감이 든다면, 요즘 유행하는 개념으로, 갑과 을 혹은 금수저-흙수저도 좋다.

좌우지간 이 모든 대립쌍에서 전자는 한줌밖에 안 되지만, 후자는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교육이든 예술작품이든 그것이 지향할 바는 이곳이어야 한다. 절대다수의 선량한 대중, 그 가운데서도 그늘진 곳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실에 분노를 품어야 한다.

 

가장 보편적인 사회적 약자는 여성이다. 여성은 지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금수저 내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그늘진 곳에서 억압을 받는다. 하물며 흙수저인 여성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흙수저인 여성이 다문화 가정에 속해 있거나 또 신체적 장애를 지닌 경우라면 그 비참한 처지는 이중 삼중 사중으로 배가된다.

따라서 예술작품으로 영화의 카메라는 이 여성의 시각에서 피사체를 향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지구상 마지막 유교문화국인 이 헬조선에서 영화들이 대체로 여성을 비껴간다.

 

1980년대까지만해도 한국영화는 늘 일본영화를 배끼며 도둑질을 일삼았지만, 최근의 한국영화는 세계최고 수준이다. 나홍진의 영화를 보며 더욱 이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 분 영화 정말 잘 찍는다. 그런데...... ‘성평등이란 차원에서, 이 영화는 지독한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유감이다.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 주인공이 평소엔 게으르고 무능하고 비겁한 행보로 일관하다가, 자기 가족이 피해를 입으니 갑자기 영웅적인 행동주의자로 돌변한다. 경찰 마누라는 그저 무식한 시골 아줌마로 자기 남편 밥이나 해대고 값싼 성욕의 배설구로만 그려진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악귀가 낚시터에서 만난 시골 아낙네를 음탕한 년이라며 비웃음과 함께 강간을 하는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무섭기도 하지만 구역질까지 나게 하는 쓰레기 장면이었다.

인터넷에서 전문가들이 늘어놓는 무슨 기호학적 분석에 따르면, 일본인의 낚시질은 음탕한 여성을 유혹하는 것을 말하며 그와 관계를 맺는 여성들이 좀비바이러스를 온 마을에 퍼뜨려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다 좋다. 그런데 서울강남도 아니고 순박한 시골 여성들을 성욕의 노예로 묘사하는 가학적 마초이즘은 현실성도 없고 경멸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선한 여자귀신(천우의 분)은 남성인 한국 무당과 일본 귀신에 비해 존재감이 확연히 떨어지는 것도 이 영화가 지닌 마초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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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에 대한 호평에 자극을 받아 어제 그가 만든 또 다른 영화 [황해]를 봤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느낌은 너무 좋다이다. 이 분 영화 정말 잘 만든다.

[곡성]보다 이 영화가 훨씬 훌륭하다.

 

이 갱스터 무비는 오우삼이나 왕가위의 홍콩느와르를 능가하는 수준이며, 핏빛 낭자한 폭력의 미학은 헐리우드의 황제 타란티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아니 타란티노 이상이며, 그래서 솔직히 나는 거부감이 인다. 곡성도 그렇고 온통 피칠갑으로 도배된 이 분의 영화는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는 맞지 않다. 오히려 헐리우드에서 환영받을 것 같고 실제로 그쪽에서 러브콜이 오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카메라 워킹도 예사롭지 않다. 부산 부두에서 찍은 추격 씬은 한국영화사에서 오래도록 회자될 명장면이 아닐까 싶다. 컨테이너를 실은 대형트레이너가 전복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자질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영상미다.

 

이 영화는 천민자본주의의 참혹상을 폭로하는 사회고발적인 요소도 품고 있다.

조선족 남성 구남은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아내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향한다. 오래도록 소식이 끊겨 사람들은 그녀가 바람이 났다고 잊으라고 하지만, 너무도 아리따운 아내와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플래쉬백으로 보여주는 이들의 정사장면은 참 아름답다. 영상도 아름답고 영상 속의 선남선녀가 오르가즘에 희열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수소문 끝에 구만은 아내를 찾았는데 사람은 못 보고 아내가 살고 있는 초라한 단칸방에 잠입한다. 사람들의 말대로 아내는 새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가족들을 영 잊은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카메라가 응시하는 것이 화장대 위에 있는 어린 아이의 사진이다. 그리고 무슨 사연인지 방은 살림살이가 다 부서져 있다.

 

주인아주머니의 말로는 며칠 전에 남녀가 크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 구만의 아내가 자신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재밌게 하기 위한 필연적 인과기제이겠지만) 운명의 장난은 야속하게도 두 사람을 엄청난 비극으로 내몬다. 아내를 찾겠다는 일념과 빚을 갚기 위해 구만은 조직폭력배로부터 살인청부 계약을 맺는데, 살인을 실행에 옮기기도 못한 상태에서 살인범으로 몰려 경찰과 조직폭력배 양쪽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초인적인 역량으로 구만은 모든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아내를 품에 안게 되지만...... 아내는 유골이 되어 구만과 재회하였다.

영화의 엔딩 씬은 너무 아름답다.

 

 

 

밤바다에 작은 배가 떠 있고 그 속에 구만이 인질로 삼은 늙은 배 주인과 구만이 있다. 지칠대로 지친 구만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고 그의 눈엔 초점이 없다. 그리고 바닥엔 피가 흥건히 흘러내린다. 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더 살 이유도 없다. 그렇게 그가 이 잔인한 세상을 이별할 때...... 아내의 유골이 바다에 던져진다. 롱테이크로 카메라를 잡았기에 누가 던졌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를 측은히 여긴 할배가 그랬을 것이다.

유골 상자는 배의 진행 방향과 반대로 떠내려가고 마침내 초라한 작은 배 또한 우리 시선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끝이다.

이 글도 끝이다.

 

2016. 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