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살이-1

오래 만나고 싶은 아이들

리틀윙 2020. 8. 2. 01:02

어제 문자가 하나 들어왔다. 재작년 도량초 학부모님인데 사연인즉, 다가오는 아이의 생일 때 내 책의 사인을 받아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는 내 첫 저서 [교사가 교사에게]는 내가 담임할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뜻깊게(?) 읽었고, 두 번째 저서 [학교를 말한다]는 나와 헤어질 무렵 구미 서점에서 구입하였다. 이 책은 초3 아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어서 부모님께서 읽으셨고 아이는 저자이자 (자신이 좋아하는)담임선생님의 사인을 받는 것을 소망한다는 말씀이었다.

 

아이와 부모님의 마음이 가상하여 흔쾌히 가겠다고 답했다. 마침 스승의 날이다. 교장선생님께서 우리 교사들을 배려하여 “은사님 찾아뵙기”라는 명목으로 조퇴 달고 일찍 나가라고 하시길래, 나는 은사 대신 제자를 만나기 위해 교문을 나섰다. 아이를 일찍 만나고 집에 가서 쉴 생각이었는데, 내 계산과 달리 아이는 집에 있지 않고 학원에 가 있었다.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다른 제자와 어머님을 만나기 위해 전화 거니, 너무 반갑다고 버선발로 달려오신다. 이 아이도 여학생인데, 얼마나 정이 많은지 수도꼭지 마냥 밥 먹다가도 내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린다고 하신다. 오늘도 나를 만나자 마자 눈물을 훔친다. 이 해의 도량초 아이들은 내 교직생애에 특별히 기억될 사랑스러운 제자들이다.

 

수도꼭지와 어머님과 셋이서 따뜻한 담소를 나누는 사이 오늘의 주인공 아이가 책을 들고 왔다.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한 뒤 책에 사인을 해주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헤어질 무렵 아이가 검은색 비닐 봉지를 내밀면서 “선생님, 약소하지만 이거...”라 한다. 집에 와서 약소한 선물을 펼쳐 보니 먹음직스런 체리다. ‘약소하다’는 어휘는 언제 배웠을까? 2년 전에 비해 여러모로 아이의 정신에 근육이 제법 붙은 느낌이다. 아이의 성장에 내가 약간은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깨가 어쓱해진다. 오늘은 내 교직삶에서 가장 행복한 ‘스승의 날’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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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에서 2학년 사이의 어느 겨울, 당구에 흠뻑 빠져있을 때였다. 우연히 친구 따라 들른 당구장의 사장님에게 깊은 정을 느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때 그 분은 그저 수많은 고객 중의 한 사람인 내게 친절을 베푼 것이었는데 나는 그게 무척 고마웠다. 그래서 ‘보은’ 차원에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당구장을 마다 하고 버스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면서 그 곳을 즐겨 찾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너무 순진하고 순수했다. 그 뒤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이런 순수성이 내 삶에서 휘발되어 갔다. 예전의 것이 좋고 뒤의 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삶의 관계망이 확장되면서 훨씬 많은 사람에게 정을 쏟아야하기 때문에 순수성의 농도가 희석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하지만, ‘순수’는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인 것은 틀림없다. 오늘 만난 아이들에게서 그간 잊고 있었던 그 가치를 다시금 새기게 된다. 이런 점에서, 최근 글에서 짚었듯이,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워즈워드).

 

이 아이들 만큼은 오래 만나고 싶다.

페이스북 하시는 부모님들 통해 두 아이가 이 글을 볼 수도 있다. 얘들아, 너희들을 평생 만나고 싶다는 선생님의 말은 진심이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지금보다 더 가깝게 다가갈게. 잘 지내렴^^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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