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학부모에게

영어 어휘력 증진 비법

리틀윙 2020. 4. 4. 21:47

저는 영어를 잘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외국인을 만나면 유창하게 대화를 하거나 하지는 못합니다. 내가 자신하는 부분은 영어 원서를 사전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어휘력(단어 실력)이 바탕이 될 때 가능한 일이죠. 


교사 영어연수 때 동료들이 내게 묻곤 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어단어를 많이 알 수 있나요?”


영어공부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이런 질문을 한 번쯤 던져보셨을 겁니다.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압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한국어 단어를 많이 알 수 있나요?”에 대한 답과 똑같습니다. 이 답은 모든 나라의 어학공부에 다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라 하겠습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 할지 모르지만, 다들 이 자명한 진리를 무시하고 자꾸 엉뚱한 데서 답을 찾으려 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 이 글의 요지라 하겠습니다. 어제 이상한(?) 영단어 암기법이 그 좋은 예입니다. 어제 예로 든 영어단어들은 그런 식의 유치한 기법이 아니라, 우리 말 익히듯이 영단어를 기억하는 방법을 썼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force(힘) : “포스 쩐다!”라는 말을 아이들이 다 이해합니다.

military(군대의) : ‘밀리터리룩’이란 개념을 아는 아이는 이 단어 뜻을 익힐 필요가 없겠죠. 3학년 아이들이어서 모른다면, 밀리터리룩에 해당하는 사진을 구글에서 찾아 보여주면서 이 개념을 설명해줍니다. 그러면 저절로 military라는 낱말 뜻이 머릿속에 자리할 겁니다. “머리 터리 밀리다”라는 조잡하고 억지스러운 방법이 아니더라도 품위 있게 상식도 익히고 영어단어도 익히는 일석이조의 공부가 이루어질 겁니다.


이 맥락에서, 영어단어 많이 익히는 비법-1은

“삶과 영어단어를 연결 짓기”입니다.

우리가 우리말을 익히는 것은 삶을 통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이 삶에서 만나는 영어단어만 모아서 체계적으로 정리해도 훌륭한 영어단어학습서가 만들어질 겁니다. 


계속해서, 영어단어 잘 익히는 비법-2는

“나의 흥미와 영어공부를 연결짓기”입니다.


어제 언급한 magical이란 단어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Peter, Paul & Mary의 아름다운 노래 [Puff, the magic dragon]를 흥미 있게 배웁니다. (이 노래는 4학년 음악교과서에 [퍼프와 재키]라는 제목으로 나오는 노래이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지니고 있는 좋은 학습소재입니다.) 한글노랫말과 달리 원 노래(팝송)의 노랫말이 흥미진진해서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면 이 노래에 푹 빠져듭니다. 그리고 후렴부분만 “펍 더 매직 드래건 리ㅂㄷ 바이 더 시... Puff the magic dragon lived by the sea” 하면서 즐겁게 따라 부릅니다. 이 문장에서 magic, dragon, sea 이런 단어는 저절로 기억이 됩니다. magic을 알면 magical은 자동으로 이해되는데... 굳이 ‘매직을 칼로 어쩌구“ 하는 조잡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넣어줄 필요가 없다는^^


어제 그 연상암기법이 나쁜 이유가 이런 겁니다. 연상은 반드시 ‘매개물’을 통해 학습자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데(=내면화), “매개의 콘텐츠가 너무 조잡하고 비교육적 일색인 것”이 문제입니다. 반면, 저의 영어 교수법은 “영어노래를 매개로 영어에 대한 흥미 갖기”입니다.


이러면, 어설픈 교육학 지식을 지닌 분은 이렇게 비판할지 모르겠습니다. “흥미 갖기”가 어떻게 교육의 목표가 될 수 있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흥미 갖기”는 교육의 시작이자 완성입니다. 어떤 과업에 흥미만 가지면 좋은 결실은 저절로 맺어집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교육을 통해 어떤 분야에 격조 높은 흥미(=공부의 멋)를 품으면 그 자체로 교육의 완성입니다.

이론적으로, 위대한 교육학자 존 듀이의 말을 빌리면, 교육은 “흥미를 위한, 흥미에 의한, 흥미의” 교육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영어단어를 달달 외우게 하는 것은 “최악의 교수법”입니다.(빡빡이를 아시나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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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말을 잘 하고 한국어 단어를 알아가는 이치를 생각해봅시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팔순 노인과 이십대 청년의 어휘력은 다릅니다. 같은 연령대의 학습자 사이에도 어휘력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노인과 청년, 같은 청년끼리의 어휘력에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인과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차원에서 논할 수 있지만, 저는 “흥미 콘텐츠”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인들 삶은 문화 실조로 인해 흥밋거리가 제한돼 있습니다. 노인들이 즐길 수 있는 흥밋거리라곤 고스돕 같은 게 전부겠죠. 반면, 젊은이들의 흥미 콘텐츠는 다양합니다. 그 결과 청년들은 노인과 달리 다양한 문화적 식견을 기반으로 한 풍부한 어휘력을 지닐 수 있는 겁니다.


같은 연령대의 청년끼리 어휘력의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제가 어제 말한 ‘공부의 멋(품격)’과 관계있습니다. 이를테면, 같은 흥밋거리라도 만화책과 문학작품, 진부한 스토리의 드라마와 수준 높은 영화는 콘텐츠의 품격이 다릅니다. 이 품격의 차이에 따라 학습자의 머릿속에 내면화되는 어휘력의 결이 달라집니다.


흥미의 콘텐츠에 품격이 있으면 어휘력의 품격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영어 어휘력 증진시키는 비법-3은,

“격조 높은 흥미 품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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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하면, 영어 어휘력 기르는 원리

1. 삶과 영어공부를 연결 짓기

2. 자신의 흥미와 영어공부 연결 짓기

3. 영어공부와 연결된 흥미의 격조를 높이기


이러한 원리를 저의 영어공부 경험과 연관지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중1때 영어 처음 배울 때 저는 팝송에 푹 빠졌습니다. 영어가 좋아서가 아니라 팝송이 좋아서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음악을 남달리 좋아하는 제게 음악은 삶입니다. 사춘기 때 팝송은 제 삶이었고 그것은 영어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해서 영어와 저의 삶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니 영어공부가 힘들게 느껴지기는커녕 재미있기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저는 영어 공부를 힘들게 해본 적이 없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영어공부는 정말 재밌습니다. 제 삶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원리1)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성문 시리즈(성문기본-성문핵심-성문종합) 영어 학습서를 공부하면서 영어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성문학습서의 장점이, 그 콘텐츠가 훌륭한 문장, 멋있는 미문으로 가득 차 있는 점인데, 제가 영어공부에 흥미를 품게 된 것이 이겁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절, 거기에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진지하게 음미하면서 나의 정신세계를 살찌워갔습니다. 위인들의 훌륭한 말씀을 영어로 읽으면서 영어실력이 성장한 것은 당연했죠.(=원리2)


그 뒤 대학원에서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 영어 원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원서 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많은 번역서들이 부실한 탓에 차라리 영어로 읽는 게 더 쉬웠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원어로만 느낄 수 있는 “공부의 멋”이 원서 공부의 커다란 매력입니다. 원서를 가까이 하면 처음에는 모르는 단어가 많지만 점점 줄어들기 마련이고 그것이 실력으로 형성되는 겁니다.


자랑은 전혀 아닙니다. 사실을 진솔하게 말하건대, 저의 영어 어휘력은 미국 대학생 수준을 능가합니다. 예컨대, 제가 평소에 가까이 하는 영어원서(교육학, 철학)를 미국 대학생은 잘 못 읽어냅니다. 이 차이는, ‘지식의 품격(=공부의 멋)’의 차이에 기인합니다. (=원리3)

영어 어휘력 형성은 우리말 어휘력 형성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우리말 어휘력을 높이기 위해 국어사전을 달달 외우거나 ‘빡빡이’로 단어 공부를 따로 하지 않습니다.

어휘력은 삶(=원리1)과 흥미(=원리2)에 기초한 나의 깊은 관심사(=원리3)에 파고 들면서 “부수적으로” 생겨나는 것이지, 어휘력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서를 거꾸로 밟는 “기형적인 학습법”에 몰두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책(원서)을 읽으면 저절로 단어실력이 향상되는데, 책 읽을 생각은 안 하고 단어실력 향상부터 신경을 쓰는 겁니다.


초등학생에게 이 원리를 적용하면, 영어로 된 동화책을 가까이 하는 게 최선입니다. “머리털이 밀리다”라는 조잡한 연상기법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흥미도 있는, 이를테면 이솝우화를 영어로 읽는 게 가장 좋은 영어공부 방법입니다.





빡빡이는 아니지만, 요즘 초등학생들은 영어학원에서 사진과 같은 숙제를 받아와서 학교에서 합니다. 낱말은 문장을 통해 앞뒤 문맥 속에서 익혀야 하는데, 저렇게 단어만 분리시켜 외우는 것은 정말 무식한 방법입니다.

아마 학원에서 친 시험지에서 틀린 낱말을 새로 연습하는 숙제 같은데, laundry는 맞추고 they는 틀린 것이 주목을 끕니다. 문장이나 글을 통해 영어단어를 익히면 'they'를 모를 수가 없는데 단어만 따로 익히니 아이의 머릿속에 '그들'이란 낱말이 잘 안 들어오는 겁니다. 낱말이 머리에 안 들어오는 이유는 '그들'이라는 개념이 아이들에게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대명사, 부사, 같은 낱말들은 앞뒤 문맥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설령 they를 '그들은'으로 맞혔다 하더라도 아이가 그 낱말의 쓰임새(=개념)를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저런 조잡한 시험의 결과가 아이의 어휘력을 정확히 말해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학교 숙제는 안 해도 학원 숙제는 열심히 합니다. 억지라라도 하면 실력은 늘 겁니다. 하지만, 저런 학습법이 어제 제가 말한 '공부의 멋'과 완전 거리 먼 것입니다. 저렇게 해서 얻는 것이 있겠지만 잃는 것이 더 많다고 봅니다.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고, 공부의 멋을 생각하지 않고 무식하게 무작정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심각한 손실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얼굴도 모르는 우리 반 아이들은 제가 내주는 숙제 하면서 영어 공부가 재미있다고 합니다. 난생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니 꼬부랑 글자가 어려우면서도 흥미를 느끼는 건데, 제가 볼 때는 영어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 영어를 매개로 한 어떤 콘텐츠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 콘텐츠는 제가 숙제로 내준 나라 이름(대문자를 소문자로 고쳐 쓰기)입니다(사진). 우리나라가 코리아(KOREA)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에 흥미를 품는 겁니다. 





무릇 교육은 이 흥미가 식지 않고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흥미만 있으면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흥미를 위한, 흥미에 의한, 흥미의" 교육이어야 한다는 존 듀이의 말을 우리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이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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