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노인과 바다 VS 아이들과 산천어축제

리틀윙 2020. 4. 4. 21:07

환경부장관이 산천어축제를 비판하자 소설가 이외수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식탁을 위해 고통 받거나 사육되고 있는지 많은 생선들이 고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쁨에 겨운 상태로 우리 식탁에 오르는 걸까?


"어떠한 동물도 스스로 생명을 인간에게 바치지 않기에 모든 육식 행위는 비인간적이긴 마찬가지!”라는 이 분의 논리는 “전부 아니면 전무 all or nothing” 오류의 전형이다. 유명 작가라는 분이 이렇게 비논리적이고 비지성적인 발언을 해대는지 너무 실망스럽다.


산천어 축제에 대해 환경부 장관이 비판하는 것은 식생활문화에 대해서가 아니다. 생선 먹는 행위를 누가 비난하는가? 축제 참가자들의 '입맛'이 아닌 ‘손맛’을 위해 물고기를 며칠 동안 굶긴 뒤 퇴로가 없는 물속에 대량으로 던져 놓는 게 문제다. 이것은 인간적인 본능인 식욕과는 무관한 순전히 오락을 위한 생명 학대인 것이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어린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다. 초등교육자로서 어린 아이들이 이 무책임한 광란의 살육 잔치에서 무엇을 배울지 소름끼친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물고기를 잡을지언정 학대는 하지 않는다. 망망대해의 대자연 속에서 노인과 물고기는 하나가 된다. 낚시를 안 해봐서 잘 모르지만, 강태공들이 낚시터에서 느끼는 정취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들에겐 그 누구도 동물학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고백하면, 한 15년 전인가 나도 우리 집 아이들이 어릴 때 산천어축제에 가본 적이 있다. 아마 첫 해 산천어축제였을 것 같다. 강원도 날씨 정말 추웠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추위에 벌벌 떨면서 얼음 구멍 속으로 낚시를 던졌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아이들도 나도 실망했지만, 우리는 그때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다. 즉, 낚시에 경험이 없는 ‘무능한 인간’과 자연 그대로의 물고기가 마주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산천어를 못 잡아도 추위에 고생을 엄청 했어도 우리 가족 모두에게 행복했던 시간으로 추억에 남아있다. 만약, 지금처럼 낚시 바늘을 던져 넣자마자 물고기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면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날을 회상하기가 매우 부끄러울 것이다.


노인도 84일 동안 한 마리도 못 잡다가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와 마주한다. 그러나 배가 너무 작은 탓에 잡은 물고기를 간수하지 못하고 상어 떼에게 다 뺏겨버린다. 노인은 자신의 ‘사유재산’을 도둑맞은 불쾌감이 아니라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빠진다. 요컨대 노인은 물고기를 "잡은" 것이 아니라 "만난" 것이다.


산천어축제에서도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깨끗한 강원도의 자연을 매개로 물고기를 "만나게" 해줘야 한다. 물고기와 우리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대등하게 마주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산천어축제장에서 벌어지는 게임은 대등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은 점에서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고 소모적이고 가학적인 오락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이런 식의 축제는 아이들에게 선량한 체험학습의 장이 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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