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시민에게

엘리트 체육정책, 폐기하자

리틀윙 2018. 11. 16. 08:20

오늘 폐막된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의 최종성적이 종합3위로 마무리 되었다. 1994년 히로시마 게임 이후 24년 만에 일본에게 2위 자리를 넘겨준 것이라 한다.

 

냉정히 말해, 이게 정상적인 결과가 아닌가? 아니,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륙 아시아에서 이 작은 나라가 3위를 거둔 것도 훌륭한 성과다. 국력이나 인구수를 생각할 때 일본은 우리의 넘사벽이다. 그런 일본을 우리가 86 아시안게임 이후 자국에서 개최한 히로시마 게임을 제외하고 무려 32년 동안 일본을 이겨왔다는 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하겠다.

 

그 기적을 일으킨 동력은 말할 것도 없이 엘리트 위주의 체육정책에 있다. 일본이 이번 대회에서 우리를 제치고 2위를 탈환한 것도 엘리트 체육정책을 펼친 결과라 한다. 엘리트 체육정책이 신성한 스포츠 본연의 정신을 위배한 꼼수라 가정할 때, 일본과 한국이 똑같이 꼼수를 벌이니 우리가 일본의 상대가 안 되는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같은 꼼수라도 일본과 한국의 결이 많이 다를 것 같다. 한 예로, 어제 금메달을 놓고 벌인 야구 한일전에서 우리는 병역혜택에 눈이 먼 엘리트 프로선수로 구성된 반면 일본은 전 선수가 사회야구단 출신이었다. 그리고 모르긴 해도, 금메달 획득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물질적 혜택도 우리만큼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엘리트 스포츠 정책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돈으로 말하는철저히 물화된 황금만능주의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언젠가 동계올림픽에서 시상대에 오른 두 선수 가운데 동메달을 딴 외국선수는 얼굴에 시종 웃음꽃을 피우는 반면 은메달을 딴 한국선수는 시무룩한 표정이어서 외국 언론이 이 진풍경의 인과관계를 조명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한국선수에게 기자가 왜 당신은 세계2위라는 훌륭한 성과에도 얼굴빛이 어두운가?”라는 질문에 그 선수는 한국선수에겐 1등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답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이게 스포츠맨십인가? 전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한국선수의 부끄러운 태도가 어찌 특정 선수의 자질 문제겠는가? 엘리트 스포츠정책이 유지되는 한, 선수들은 메달 색깔에 조건화될 수밖에 없다. 과정보다는 결과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팀의 성적보다는 나의 성적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역설적으로 스포츠맨십이 요구하는 이타적인 인간의 정반대편에 있는 지독한 개인주의의 화신이 길러질 수밖에 없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

스포츠는 경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경쟁은 자신과의 경쟁이어야 한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할 때 스포츠인은 아름답다. 그 숭고한 정신이 스포츠맨십의 전부다. 그런데, 엘리트 스포츠정책이 길러내는 한국의 스포츠맨 가운데 이런 정신을 지닌 선수는 확신컨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덧붙여, 교육자로서도 나는 이 치졸한 엘리트스포츠정책에 반대한다. 몇 년 전에 체육부장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우리 학교에 육상 유망주 학생이 두 명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200미터 경상북도 1위 학생이었고 종목이 다른 한 학생은 군에서 1위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군 체육지도 관계자가 당시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이 두 학생을 운동 쪽으로 진학 시키기 위해 체육부장인 내게 집요하게 요청을 해왔다. 학생과 부모를 설득시켜 달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모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엘리트스포츠 정책의 문제점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첫째, 상상을 초월하는 국가예산이 이 꼼수 스포츠정책에 투자된다.

도 대회도 아니고 군 대회에서 1등 하는 학생을 체육계로 유인하기 위해 거금 1백만원을 장학금으로 준다는 제안을 한다. 군 단위에서 이런 학생에게 지급할 예산이 이 정도니 전국적으로 엘리트스포츠정책 차원에서 투자되는 예산 규모는 가히 천문학적인 수준일 것이다.

 

 

둘째, 결과 중심의 성적 지상주의 엘리트 스포츠 정책은 비인간적이고 비교육적인 소외로 점철된다.

군 대회에서 1등 하는 학생이 공부를 포기하고 운동을 하면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 아이의 장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엘리트를 육성하기 위해 조직은 이 아이를 필요로 한다. 0.01퍼센트의 영재를 육성하기 위해 최소 99퍼센트의 들러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아이는 특정 시기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에 출전할 0.01퍼센트의 엘리트 육성을 위한 소모품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쓰레기 엘리트 체육정책이 귀하디귀한 절대 다수의 아이들을 소모품으로 쓰고자 체육 진로라는 이름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예전에 우리가 가난할 때는 이 소모품 정책이 통했다. 운동으로 성공 못할 확률이 99퍼센트 되는 줄 알면서도 체육중학교에 진학하는 이유는 학비가 공짜이고 무엇보다 밥을 먹여주기 때문이다. 라면 먹고 86아시안 게임의 육상 스타가 된 임춘애 선수의 신화가 탄생한 배경이 이런 거다.

 

그런데, 국민소득 2~3만불 시대의 오늘날은 이게 통할 수 없다. 아무리 가난해도 밥 굶는 아이 없고, 소득이 낮은 가정에서도 아이들은 다 귀하게 키운다. 힘든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요즘 아이들이 운동하는 삶을 자청할 이유는 없다. 아무도 운동 안 하려 한다.

 

그러나, 0.01퍼센트의 엘리트를 키우기 위해 99퍼센트의 들러리를 필요로 하는 엘리트 스포츠 정책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학생 개개인을 공짜 밥이나 돈 백만 원으로 유혹하는 게 통하지 않으니, 행정적으로 학교를 쥐어짠다.

 

지금도 초등학교에서 체육교육 담당자의 가장 성가신 업무가 각종 스포츠 대회에 학생을 출전시키는 것이다. 대회 성적으로 학교를 줄세우니 학교장은 담당자에게 은근히 성과를 요구한다. 그리고 육상대회를 비롯한 거의 모든 대회는 학교 참가가 의무다. ,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체육담당자이기 이전에 교육자인데, 체육담당자는 대회 나가기 싫다는 아이를 어렵사리 설득해서 대회에 출전시킨다. 모든 대회, 모든 종목 경기는 1등과 꼴찌가 존재한다. 자신의 애가 꼴찌해서 심각한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있어도 교사는 대회에 참가해야 하고 아이를 출전시켜야만 한다. 교육자적 양심을 저버리고 말이다.

 

끝으로, 0.01퍼센트의 엘리트 선수를 육성하기 위해 투자하는 예산은 국민들의 혈세에서 온 것임을 명심하자. 이제 우리 국민들은 금메달 개수 하나 늘 때 기뻐할 게 아니라, 메달 개수만큼 혈세가 지출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체력이 국력이라면, 극소수 선수들의 체력을 기를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의 체력을 길러야 한다. 엘리트체육이 아닌 사회체육을 육성해야 한다.

 

1등의 영광이 있는 곳에 꼴찌의 비애가 있고, 0.01퍼센트의 엘리트 뒤에 99퍼센트의 들러리가 존재하는 제로섬 게임의 냉엄한 원칙은 국가예산지출 원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정된 국가예산은 효율적으로 집행해야 한다. 물 쓰듯이 쓰는 엘리트체육 예산을 전체 국민의 복지를 위해 쓰면 아래와 같은 청년 군인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페친의 말씀처럼, 병역 혜택은 금메달 야구선수가 아닌 저런 청년에게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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