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시민에게

30년 의사와 30년 교사의 차이는

리틀윙 2018. 6. 26. 07:26

 

30년간 수술을 집도해온 전문의는 환자들에게 환영을 받지만, 30년간 학생을 가르쳐온 교사는 학부모들이 기피한다. 그 이유가 뭘까? 이걸 단순히 대중의 편견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면 곤란하다. 현실 속에서 어떤 문제가 생겨날 때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이 인과관계에 주목하지 않으면 문제 속의 당사자는 문제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30년 경력의 의사는 고객들이 선호하지만 30년 경력의 교사는 학부모들이 기피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두 일의 성격 차이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시술을 하는 일은 경험이 많을수록 역량도 커져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르치는 일은 그렇지 않다. 초임교사라면 일천한 경력이 핸디캡이 될 수 있지만, 몇 년 만 지나면 고경력자와 저경력자 사이에 경험에 따른 실력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둘 다 전문직으로 일컬어지지만, 의료 행위와 교육 행위의 전문성 또한 성격이 다르다. 의학은 해가 거듭할수록 눈부시게 발전해 가지만 교육학은 그러하지 않다. 존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1916년에 발간되어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 이를 능가하는 교육이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대부분 교사의 전문성은 대학교 전공 수업 때 배운 수준에서 별 진전이 없는 반면 의사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꾀해야 하기 때문에 경력이 쌓일수록 전문성도 성장해 간다. 고 경력 의사라도 새로운 이론 섭렵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자기 세계에서 무능한 사람으로 평가될 것이다.

 

어떤 직업을 전문직으로 분류하는 기준이 뭘까? 전문성이란 어떤 속성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관해 많은 학자들의 견해가 소개되고 있지만, 나는 간단히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전문성의 핵심이라 말하겠다. 어떤 일이 전문적이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누구든 경험만 쌓으면 베테랑이 되는 일은 전문직이 아니다. 경험치가 이론적 소양과 결부되어 전문성을 이루는 일을 전문직이라 칭할 수 있다.

 

나는 30년 의사와 교사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초임 교사와 초임 의사 사이에는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의 차이가 별로 없다. 그런데 30년간 환자들을 시술하는 과정에서 실천적 지식(노하우)과 이론적 지식(의학 이론)이 원숙하게 조화를 이룬 의사는 30년이란 수치만큼 자신의 역량이 성숙해 있음에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교사는 경력이 쌓일수록 점점 초라해지고 불구화 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불구화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수레의 나란한 두 바퀴 가운데 어느 한 쪽이 기형적으로 왜소한 것과 관계있다.

 

아이들 가르치는 교사에게 이론이 뭐가 중요한가 하는 반문이 예상된다.

첫째, 가르치는 일 자체가 이론적인 속성이다. 교사가 책을 멀리 하면 누가 가까이 하겠는가? 학생들에게 더 나은 수업을 하기 위해 교사는 끊임없이 자기 지성의 그릇을 확장해가야 한다. 무엇에 대해 깊이 아는 사람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은 속성상 단련하지 않으면 현상(現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퇴화된다. 좋은 예가 영어 실력이다. 초등교사가 영어 공부를 멀리하면 그나마 학창시절에 익혔던 단어도 다 까먹게 되고, 아이들이 선생님, ~~가 영어로 뭐예요?” 물어올 때 답을 못한다. 학생이 교사에게 실망을 품는 지점이 이런 순간이 아닌가?

 

둘째, 교직이 전문직이라는 것은 수업만 잘 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비단 특정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사물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력과 철학이 요구되는 일이다. 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건강한 공민을 육성해내기 위해서는 나눗셈을 가르치는 일보다 나눔을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학원 강사와 학교 교사의 차이가 여기 있다. 수학 실력만 놓고 보면 전자가 후자보다 더 유능할 수 있다. 이것은 바람직한 인간 삶에 대한 고민을 요청하지 않는다. 하지만, 백년지대계는 이런 게 아니다. 시대의 교육이 교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시대정신에 관한 건강한 철학과 지성적인 식견이고 전문성은 이를 말한다.

 

셋째, 부단한 지적 단련을 통해 교사는 학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수업이 있기 전에 만남이 있다. 학생에 대한 이해는 교육의 세 가지 기초인 철학-사회학-심리학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바탕 될 때 가능하다. 나의 경우 10년 전보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이론을 통해서였다. 존 듀이와 비고츠키를 알고 나서 나의 교육실천에는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보다 아이들에게 화를 덜 내고 아이들의 행동과 심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정리하면, 의술과 교육은 둘 다 전문성을 기초로 한다. 의료행위와 달리 교육행위에서는 딱히 전문성을 신장시키지 않아도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교사들은 자기 연찬을 게을리 한다. 하지만, 그 게으름이 30년이나 지속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능한 늙다리 교사로 전락해 있다. 30년 의사는 인정받는 반면 30년 교사는 기피되는 이유는 전문성 신장의 차이로 좁혀진다 하겠다. 교사 또한 해를 거듭할수록 실천과 이론의 조화를 이루며 끊임없는 자기 성장을 꾀한다면 학부모와 학생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병원을 찾는 환자와 달리 학생은 미성숙한 어린 아이 혹은 청소년들이다. 해마다 학생의 나이는 변함없지만 교사는 점점 늙어간다. 말하자면, 해가 갈수록 교사는 학생과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다. 이 멀어져감이 정서적 교감의 격차로 이어지는 것이 교직의 슬픈 운명이다. 젊은 교사가 더 인정받는 이치가 이런 거다.

 

다행히도, 에이징의 핸디캡은 신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이 크다. 몸이 안 따라가서 잘 못 가르치는 것은 거의 없다. 정신적인 부분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데, 이것은 끊임없는 지적 단련을 통해 가능하다. 더 나은 수업을 위해 그리고 인간과 인간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론 섭렵을 게을리 하지 않는 교사는 나이가 들수록 전문성도 비례하여 성장해 가기 때문에 30년 의사와 교사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어진다. 이런 교사를 학생, 학부모가 기피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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