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우리가 선택한 삶이 아니다

리틀윙 2018. 11. 16. 08:17

대구 어느 아울렛 매장이다. 식구들과 옷 사러 갔다가 내 옷을 먼저 사고 어디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아내랑 딸과 헤어졌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장소 근처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어디 앉아서 쉴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건물 밖을 나와 화단 턱에 엉덩이 걸치고 앉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의 혜택을 포기하고 밖에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매장에는 왜 쉴 곳을 안 만들어 놓았을까?

 

이 대형 매장의 자본주의시스템이 고객에게 강제하는 매정한 명령어가 읽힌다 - 계속 걸어! 계속 걸으면서 매장의 상품들을 눈에 담고 뇌는 영혼에게 구매 욕망을 부추기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선택은 자유다. 그게 싫은 사람은 밖으로 나가면 된다. 에어컨 바람의 혜택을 포기하고 말이다.

 

이건 내가 선택한 결과가 아니다. 이 더운 날씨에 시원한 실내에 있고 싶지 누가 더운 바깥으로 나가고 싶겠는가? 이것은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반강제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마저 저버리는 이 무례한 천민자본주의 시스템에 분노를 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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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그렇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닌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강제된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나는 최근에야 내가 입고 있는 바지의 통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고 멀쩡한 바지를 버리고 통이 좁은 것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통이 좁다란 바지는 우리 어린 시절에 노는 애들이 입는 일명 당고바지. 선량한 삶을 살아온 50대 남성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타일인데 이젠 나도 어느덧 이 스타일에 적응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 내가 통이 큰 바지를 입고 다니던 것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방식이었던가 하는 각성까지 하게 된다. 새로 장착한 이 미적 감각은 결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강제된 결과다.

 

야간에 편의점에서 열심히 알바 뛰어 모은 돈으로 명품 가방 하나 손에 걸치고선 포만감에 취해 있는 젊은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이 과연 자신이 선택한 것일까?

 

20년 전엔 양담배 피우면 매국노 취급 받았지만 지금은 안 그렇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외제 차는 아주 특별한 계층이 아니면 선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개나 소나 벤츠 혹은 BMW 몬다. 한미FTA 이후로 이렇게 되었다. 이건 우리가 선택한 삶이 아니다. 초국적 거대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의 아비투스(habitus)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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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열공 하는 취준생의 풍속도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저만한 나이 때는 도서관에서 이렇게 열공 하는 청년들이 많지 않았다. 이건 청년들이 선택한 삶이 아니다.

 

일견 모든 것은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로 보인다. 도서관에서 열공하는 것도 자유고, 백수가 되어 빈둥거릴 것도 자유처럼 보인다.

 

절대 안 그렇다. 길거리에서 노숙할 자유를 자유라 부르지 않으면, 이건 결코 자유로운 삶이 아니다. 강제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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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관계없음으로 점철되는 청년들의 도서관 일상은 우리 집 아이의 미래이기도 하고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문제는 교육자인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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