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관계없음

리틀윙 2018. 10. 26. 16:25

도서관 문화 체험학습 보름째를 맞고 있다. 가치론적 차원에서 우리 사회는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신뢰와 성원을 보낸다. 누구나 책 읽는 아이를 보면 머리 한번 쓰다듬어주거나 맛있는 거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이 도서관에서 1층에 있는 어린이 도서실을 찾는 초등학생들에게선 몰라도 2, 3층의 열람실을 이용하는 고등학생들이나 어른들에게선 그런 긍정적인 면모를 잘 볼 수 없다. 지금까지 내 시야에 들어온 이들의 행동양식들은 많은 부분 씁쓸하고 충격적이다. 그것은 대략 관계없음으로 특징되는 행동들이다.

 

좀 전에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어떤 사람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여서 열기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그 분을 기다리고 문을 닫기까지 1초도 안 걸렸다. 그런데 그 분이 내게 고마워요라는 말을 건넨다. 이 분의 반응은 내게 두 가지 면에서 자극을 주었다.

 

첫째, 이런 반응은 이곳에서 잘 보기 드문 모습이다.

보름째 이곳을 찾다 보니 열람실 공동체를 출입하는 사람들의 면면이 익숙해져간다. 나처럼 일찍 오는 사람들은 매일 거의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도 서로 눈인사조차 교환하지 않는다. 좁다란 공간에서 48명이 함께 하지만 이곳은 황량한 공동묘지를 연상케 한다. ‘관계없음속에서 무덤 같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다. 그런 면에서 고마워요라는 이 여성의 반응은 가뭄의 단비처럼 반갑게 다가왔다.

 

둘째, 1초도 안 걸린 지극히 작은 성의에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평소 이곳에서 남을 위한 배려가 거의 없는 관계없음의 삭막한 현실을 웅변해준다. 1층 건물 진입하는 문을 비롯해 열람실 문까지 모든 출입문은 여닫이문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앞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바로 뒤에 누가 따라 오면 문을 잡아 주곤 한다. 동료와 함께 하는 직장 건물에서는 물론이고 은행이나 시청 건물에서는 누구나 이렇게 한다. 그런데 이곳에선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주는 것은 물론 미닫이 문 사용에 있어서도 뒷사람을 위한 배려의식을 잘 볼 수 없다.

 

관계없음의 입장은 단순히 중립적인 행보를 뜻하는 게 아니다.

이곳에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고갈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는 소소한 비행의 문화도 만연해 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한 ‘12석 차지의 욕심이 그 한 예다. 뿐만 아니라, 화장실에서 손 닦기 위해 휴지를 사용한 뒤 휴지통에 제대로 버리지 않아 바닥에 너즈러진 풍경이 흔히 목격된다.

 

관계없음이 소소한 비행으로 연결되는 가장 심각한 행태는 지우개 가루 치우기문제다. 며칠 전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열공 하다가 옆에 더 좋은 자리가 나자 그쪽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자기 책상위의 지우개 가루를 치우지 않고 그냥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학생이 떠난 자리에 취준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앉았다. 청년은 흔히 겪는 일이어서인지 묵묵히 책상위의 지우개가루를 쓸었고, 가해자인 고등학생은 청년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 없이 자기 공부에 열중했다. 청년의 심사는 자신에게 관계없음이기 때문이다.

 

그 고등학생 또한 이곳에서 이웃의 소소한 비행에 피해를 겪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관계없음의 일상에서는 만인이 만인에게 소소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말하자면, 손익계산서가 제로인 점에서 일견 공평한게임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학적 계산으로는 그러할지언정 인간학적으론 절대 안 그렇다.

화장실에서 손 닦은 휴지를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그것을 주워 휴지통에 제대로 버리는 것과 그냥 가버리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모두가 똑같이 소소한 일탈을 범하는 사회와 모두가 공중도덕을 지키는 사회는 가해-피해의 손익계산서는 똑같지만, 그 행복도는 지옥과 천국의 차이만큼 클 것이다.

 

여름방학인데 도서관에서 뿔테 안경 쓰고 열공하는 모습에서 전형적인 모범생의 기운이 느껴졌다. 내신 몇 등급인지 모르지만, 자기가 배설한 것을 치우고 가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걸 모르는 학생에게 내신 몇 등급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내가 만나는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이런 아이를 잘 볼 수 없다. 시청에서도 은행에서도 볼 수 없는 반사회적인 소소한 일탈행위가 횡행하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도서관이다. 공부하는 모습이 꼭 아름다운 것이 아닌 이유라 하겠다.

 

열공 공화국 헬조선에선 공부만 잘 하는 괴물이 양산되고 있다.

초등학교 때는 안 그랬던 아이가 갈수록 남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이 되어 가는 까닭은 공부만 죽도록 시켜서 그렇다. 내신등급으로 줄을 세워 남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는 것만 학습시키는 것이다. 이 살인적인 생존경쟁 시스템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괴물이 되어간다.

 

서로 배려 안 하고 배려 안 받는 삶,

서로 소소한 피해를 끼치는 것이 일상화된 삶,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관계가 실종된 관계없음의 일상은 무덤이다.

 

적폐청산보다 더 시급한 것은 관계있음의 사회, 공동체의 회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적폐청산과 공동체의 회복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 둘은 오직 경제정의의 실현 하에서만 가능하다.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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