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열공 사회

리틀윙 2018. 10. 26. 16:07

살인적인 폭염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았다.

이번 ()부터 시립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고 있다. 평소에는 방학 맞은 대딩 딸과 아침8시부터 오후5시까지 공부하는데, 오늘은 더 공부하고 싶어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돌아와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다.

 

집에 있으면 더워서 짜증만 나고 아무 일도 못하는데 여기는 정말 시원하고 조용해서 공부할 분위기가 그만이다. 연일 계속되는 더위에 전 국민이 몸살을 앓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휴가 장소는 도서관이고 최선의 피서 방법은 시원한 도서관에서 공부하기이다.

 

...................

 

이 열람실의 좌석이 48개인데 낮에는 꽉 차있다. 모두들 열공 하는데, 나와 나머지 사람들은 열공의 결이 적잖이 다를 것 같다. 나는 흥미를 위해 열공 하고 이분들은 생계를 위해 열공 한다. 이들의 눈에선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모두들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것 같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굳어 있다.

 

예전에 TV에서 본 박카스 광고가 생각난다. 밤늦도록 공부한 뒤 마지막 버스에 몸을 실고 깜빡 졸다가 종점까지 가버린 학생에게 운전기사가 박카스 한 병을 건네면서 젊은이, 힘내시게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때는 따뜻한 풍경으로 다가왔지만, 지금 나는 이런 장면에서 별 감동을 못 받는다. 오히려 이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가 너무 끔찍하다. 즐겁게 해야 할 공부를 이를 악물고 죽기 살기로 하는 청년 학생들이 너무 안쓰럽다.

 

공부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어야 한다. 세계를 이해하고 사물의 인과관계를 알아가는 인식론적 호기심(gnosiological curiosity)이 충족될 때의 기쁨이 없이 무슨 시험 잘 치기 위해 지식을 억지로 집어넣는 공부, 프레이리가 말한 은행저금식 공부는 인간적인 성장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고역일 뿐이다.

 

이런 공부가 나쁜 것은 열심히 공부할수록 배움과 멀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같은 학교에 근무한 행정실장은 공무원 시험 치기 위해 죽도록 공부한 탓에 지금도 꿈에서 공부하는 악몽을 꾼다고 한다.

 

열공하는 사회,

3교실에서는 청소년들이

도서관에서는 취준생들이

밤늦도록 죽기 살기로 문제집 풀어대는

이러한 열공이 개인의 행복은 물론 국가 발전에도 무슨 도움이 될까?

 

오히려 이 시기에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브람스와 릴케에 심취하고 마르크스를 읽고 깡소주 들이키며 친구와 밤새도록 인간과 사회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다. 이런 낭만과 열병이 이들을 성장시키고 이 사회를 발전시킨다.

 

너무 조용해서 노트북 자판질 하기가 미안한 무덤 같은 적막이 흐르는 이곳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이 헬조선 사회 자체가 거대한 무덤이다.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청년 학생들 사이에서 이러한 비평 글 남기는 것이 사치이고 허영일 것 같다. 이들에게 이 삭막한 삶을 물려준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2018.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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