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변화

리틀윙 2018. 10. 26. 16:18

열람실 출입문에 누군가가 포스트잇으로 호소문을 붙여 놓았다.

 

>> 한 자리씩만 사용해 주세요 ^_^

책가방 때문에 자리 사용 못하는 사람 많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배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 쪽지를 내가 본 것이 어제 점심 먹고 들어오면서였다. 시간상으로 오전에 내가 벌인 작은 소동과 관계있을 것 같다. 청년에게 낮은 목소리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실내가 워낙 조용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상황을 목격했고 또 그 실랑이의 인과관계도 간파했을 것이다.

 

나는 지난주부터 열람실 공동체에 함께 하고 있지만, 청년 취준생들은 오래 전부터 이 공간을 이용해 왔기에 이 문제는 이런 곳에서 만성적으로 벌어지는 부조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인식력의 기원은 고딩 수험생 때로 거슬러 올라갈 것 같다.

 

이게 문제다!

어제 그 몰염치한 청년의 행동보다 거기에 문제의식을 품고 개선을 위한 액션을 취하기는커녕 분노조차 안 품는 게 심각한 문제다.

 

생래적으로 인간은 부조리에 굉장히 민감하다. 어린 아이들을 보라. 초등 교실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 아이들이 자기네 일상에서 빚어지는 아주 사소한부조리를 일러바치고 담임교사는 그 송사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피해자를 진정시키는 목민관 노릇하느라 힘들기만 하다. 그런데, 학생들은 성장 과정에서 차츰 이 일상 속 부조리에 무관심해져 간다.

 

요컨대 이것은 학습된 무관심이다.

부조리에 대한 무관심이 학습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네 삶이 너무 팍팍하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빚어지는 작은 부조리에 관심을 쏟기엔 이들의 열공 전선이 너무 치열하다. 대학 입시든 공무원 시험이든 제로섬게임을 본질로 하는 수험 공부에서 남들이 인강에 집중할 때 공동체의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에게 덕 될 일이 없는 것이다.

 

안타깝다.

열공이라 하지만, 이곳에선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험에 대비한 지식의 축적이 있을 뿐 인간을 성장시키는 배움은 없다. 이곳에서 이들은 오직 무관심을 배워간다. 부조리에 신경 끄기, 사회 모순에 관심 갖지 않기, 사회적 약자의 삶에 둔감하기......

 

하지만, 알아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근시안적인 행동양식일 뿐이라는 것을.

개인주의적 무관심은 결국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오늘 나는 자리를 확보해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옆 테이블의 누군가가 12석의 부조리를 범하는 것이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넘긴다면 내일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잇을 붙인 사람의 취지가 그런 것일 게다. 아마 이 분은 나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지금이 적기라 생각하고 이 대자보를 붙였을 것 같다. 포스트잇이니 대()자보라는 표현은 형용모순이다만, 나는 이 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지금 앞자리에서도 한 청년이 어제 그 청년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고, 방금 한 여성 분이 들어와서 자리를 쭉 둘러보고는 빈자리가 없다 생각해서인지 퇴장해버리신다.

 

열하루 째 이곳에서 청년문화에스노그라피 공부를 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이 일상적인 부조리는 콘크리트처럼 공고히 만성화되어 있어 보인다. 이것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 속의 쪽지가 내겐 크나큰 감동과 희망으로 다가온다.

 

변화를 망가뜨리는 무관심도, 변화를 이끄는 용기도 학습된다.

나는 어제 나의 오지랖이 이 공동체 내 48명 모두에게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몇몇에겐 선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포스트잇을 남긴 이 분의 작은 실천이 또 누군가에게 변화의 씨앗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변화는 언제나 작은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변화는 경작해 가는 것이다. 어리석은 오지라퍼가 산을 옮긴다(우공이산). 그 오지라퍼들이 뿌린 씨앗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 둘 참여하여 함께 나무를 가꿔 갈 때 세상은 바뀐다.

 

8.9. 


'삶과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계없음 vs 관계있음  (0) 2018.11.16
관계없음  (0) 2018.10.26
사람은 오지랖이 넓어야 한다  (0) 2018.10.26
열공 사회  (0) 2018.10.26
의사와 교사의 차이  (0) 2018.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