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사람은 오지랖이 넓어야 한다

리틀윙 2018. 10. 26. 16:14

<선천성 오지랖 조절 장애>

 

이 폭염을 견딜 수 있는 최고의 피서 방법이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라 했다. 한 열흘 째 도서관에 오고 있다.

도서관은 자료실과 열람실이 있다. 우리가 아는 도서관 본연의 목적인 책 빌리는 곳은 자료실인데, 한국의 도서관은 이런 목적 외에 수험생들이 열공하기 위한 공간으로 열람실이 있다. 이곳에선 열람이란 말뜻과 전혀 무관한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열람실은 총 4곳인데 내가 있는 열람실은 노트북 유저들을 위한 곳이다. 이곳은 가로-세로가 6미터씩 되는 좁은 공간인데 가로1.3M-세로1.1M쯤 돼 보이는 탁자에 4명이 노트북을 펴서 열공 모드로 들어간다. 탁자가 4개씩 3줄이 있으니 4*4*3 해서 총 48명이 이 자리를 이용할 수 있다. 8시에 도서관 문을 여는데, 10시 이전에 자리가 꽉 찬다.

 

그런데, 방금 어떤 남자 취준생이 입실해서 내 옆 탁자에 앉는데 자리를 두 개나 차지한다. 옆 자리엔 커다란 가방을 걸쳐 놓고 그 위 책상에는 책들을 올려놓는다. 두 사람이 쓸 자리를 자기 혼자 독차지하겠다는 심사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책 표지를 보니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듯하다. 이런 놈들이 열공 해서 공무원 되면 나라 꼬라지가 어떻게 될까 한심하다.

 

선천성 오지랖 조절 장애를 안고 사는 내가 이걸 좌시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참고 견디면 오히려 암 걸릴 것 같기에, 나는 내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떤 식의 액션을 취해야 한다.

 

일단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겸 화장실에 갔다. 자리로 돌아와 앉기 전에 옆 사람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 가방과 책을 이렇게 놓으시면, 다른 사람이 이용하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청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 조금 있다 사람 오면 치워 드릴 겁니다.

: 아니, 이렇게 짐이 놓아져 있으면 누군가가 있는 줄 알고 그냥 가실 것 아닙니까?

 

할 말을 잃은 청년의 표정이 굳어진다. 나도 더 이상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청년의 어깨에 두 손을 살포시 얹으면서, “괜한 간섭을 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 조용히 앉아서 이 글을 쓴다.

 

이 무더운 여름에 이곳은 공부하기엔 최고다. 그러나, 에어컨 바람은 너무 시원해서 춥기까지 하고, 분위기는 너무 조용해서 살벌한 지경이다. 이 폭염에 추워서 모두들 겉옷을 입고 공부를 한다. 재채기와 기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오지만 아무도 에어컨 온도를 올릴 생각을 안 한다. 어제는 내가 가서 1도 올렸다. 한결 낫다.

 

인간은 둘 이상이 모이면 사회다. 48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함께 기거하는 이 공간은 공동체다. 사람이 많이 있으면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방금 지적한 냉방 온도 문제가 그러하고, 또 이 글의 발단이 된 12석 차지 문제가 그러하다. 그래서 출입문에 “11석 사용을 촉구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양심 불량인 사람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미 자리를 잡아 공부하고 있으니, 그 양심불량자로 인해 선량한 피해자가 발생해도 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헬조선 대한민국, 정상이 아니다. 도서관은 마음의 양식인 책을 빌려 읽고 착한 마음을 쌓는 도량(道場)이다. 그런데 이게 독서실이지 도서관인가?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열공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열공인가? 눈앞에서 벌어진 부조리에 대해 외면하고 침묵하면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

 

청년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인간은 항상 시대의 인간일 뿐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몇 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만 가능한 사회에서 청년들이 자기 앞가림에 몰입하고 주위에 신경을 안 쓰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다운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존재 양식이 의식을 규정하지만, 거꾸로 의식이 존재 양식을 바꿀 수도 있다. 팍팍한 삶의 조건을 바꾸는 것은 이러한 의식이다. 바른 사고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작은 부조리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한다. 작은 것에 슬퍼하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큰 부조리에도 침묵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지라퍼가 돼야 한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는 비정상이다. 선천성 오지랖 조절 장애 환자다. 재수 없게 이상한 꼰대 만나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청년이 지금 옆에서 씩씩하게 열공하니 다행이다.

 

사실, 도서관은 시끄러워야 한다. 유대인들의 도서관이 그러하다. 유대인 청년들은 도서관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도 왁자지껄 토론을 나눈다. 극소수의 인구로 미국을 지배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인 역량의 맹아가 이것이다(하브루타).

 

반면, 48명이 운집한 곳에서 공동체 의식은 눈곱만큼도 없고 모두가 자기 책만 파는 곳에선 발전이 없다. 이 살인적인 경쟁 사회는 희망이 없다. 모든 청년들을 개인주의자로 길들여가는 사회에서 무슨 희망을 품겠는가?

 

열공 공화국 헬조선.

도대체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열공인가? 눈앞의 부조리를 외면하고 오직 열공만 하면 우리의 영혼이 망가진다. 원하는 직장엔 다가갈 수 있을 지 몰라도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분노할 때 분노해야 인간다운 삶이다.

사람은 오지랖이 넓어야 한다.


2018.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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