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교육

‘선생님’이란 호칭에 대하여

리틀윙 2018. 7. 12. 14:05

 

88년에 경북 의성군에 초임 발령을 받아 8년을 근무한 뒤 구미로 옮겼다. 의성의 두 학교와 구미의 첫 학교는 모두 농촌지역의 작은 학교였다. 그 뒤 구미의 큰 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아이들 일기장을 읽어내려 가다가 선생님이란 낱말이 몇 번 나오는데,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내가 일요일에 아이랑 같이 있지 않았는데, “선생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헤어졌다.”라는 문장이 나오는 거다. 그제서야, ‘, 내가 아닌 다른 선생님이구나하는 각성이 일었다. 그 뒤 심심찮게 다른 여러 아이들의 일기장에서도 내가 아닌 선생님이 등장했다. 처음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각성이 이내 배신감을 넘어 괘씸함으로까지 옮아갔다. 흡사 이것은 다른 남자/여자와 통정한 연인에게 느끼는 질투심이나 상처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아픈 만큼 성장한다. 냉철하게 문제가 발생한 인과관계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시골 작은 학교와 달리 도시의 큰 학교에서 아이는 꼭 학교 선생만 만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이때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사교육이 한창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에 따른 아이들 일상 풍속의 변화를 인정해야만 했다. 아이 입장에서 학교 선생보다 학교 밖 선생이 훨씬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니 전자보다 후자를 더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교사 입장에서는 그저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구축하는)” 자본주의 경제 섭리에 따른 불가피한 홍역을 치르는 것으로 자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뒤 몇 년이 지나 학교 밖뿐만 아니라 학교 안에서도 선생님이라는 호칭 사용의 평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무원 노조가 생기면서 학교 행정실 직원들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쓸 것을 요구해왔다. 단적인 예로, 예전에 우리가 학교 소사라 일컫던 분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영화 [선생 김봉두]에서 주인공 김봉두의 아버지가 학교 소사였는데, 수업시간에 담임교사가 너희들 공부 안 하면 저 밖에 있는 소사처럼 된다라는 말에 김봉두가 충격을 받는 다. 보통 학교에선 교사들이 아저씨라 불렀고, 예의를 갖춘 호칭으로 김 주사라는 식으로 불렀다(법원에서 주사6급공무원으로서 사무관 바로 아래의 직급이다. 따라서 이 호칭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주사도 부족해 선생님이라 불러달라니 교사 입장에선 어떻게 소사가 나랑 똑같은 선생님 되냐?’며 반발심이 이는 것이다.

 

교사들의 이러한 반발심은 소인배적 계급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소인배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그 시절 학교에서 돼 먹지 못한 교장/교감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교사들은 돼먹지 못한 관리자들에겐 꼬박꼬박 존대를 하면서도 학교 내에서 그늘진 곳에 있는 동료에게는 자기 내면의 식민지적 권위주의를 내려놓는 것에는 완강히 저항하는 것이다.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는 남자들 사이에 사장님이란 호칭을 즐겨 쓴다. 카센터에 차 고치러 가면 개나 소나 사장님이라 불러 준다. 그런데 요즘 카센터에선 몰라도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엔 사장님대신 선생님이란 호칭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세태가 이러한데, 학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도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불러주는 게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교직원의 경우는 그렇게 이해하면 되지만, 아이들의 경우는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아이들에게도 학교에 있는 모든 교직원들에게 선생님이라 부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행정실 직원에게 아이들이 아저씨 / 아줌마로 부르게 방치하는 것이 교육적인가 생각해 보자. 앞서 말한 소사는 옛날이야기이고, 지금 주무관으로 발령 받는 사람들은 모두 인텔리들이다. 더 이상 아저씨, 아줌마가 아니다. 이러한 조치는 교직원들에 대한 배려도 배려지만 장차 이 나라의 주역이 될 아이들을 건강한 공민으로 길러내기 위한 취지에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학교교육이 지향하는 지고의 가치는 민주주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가 인간존중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거늘, 우리는 학생들에게 모든 사람을 대등하게 존중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교육은 삶 속에서 실천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대등하게 존중하는 실천의 첫걸음은 호칭의 민주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일단 호명(呼名)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호칭 속에는 호명 주체와 객체의 인격이 내포되어 있다. ‘사장님이란 호칭은 갑을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에 호명의 주체는 을이 되고 객체는 갑이 된다. 그래서 갑질이 일어난다. 대표적인 예가 텔레마케터 같은 감정노동자들이 당하는 인격침해다. 반면, ‘선생님이란 호칭에서는 호명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대등한 만남이 전제된다. 우리 일상 속에서 사장님이란 호칭이 사라지고 선생님이란 호칭이 일반화 될 때, 우리 사회의 많은 적폐도 사라질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것은 결국 나를 존중하는 것이 된다.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모든 어른들을 대등하게 선생님이라 부르게 하는 것은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대등하게 존중받는 결과로 이어져, 종국적으로 우리 사회가 덜 추한 사회가 되고 또 우리 아이들이 덜 상처받는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다.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나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말은, 존중 받아본 사람만이 남을 존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감정노동자에게 포악한 갑질을 해대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곳에서 사회적 약자로 갑질을 당해본 사람들일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선생님이란 소리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다. 모두가 모두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회가 오면 이런 갑질의 악순환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학교에서 교사인 선생님과 일반 직원인 선생님 사이에 차별화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영어에서도 teachermadam/sir의 의미가 다르니 말이다. 공무원 노조 이후 학교사회 내에서 선생님이란 호칭의 평준화에 대해 교사들이 반발하는 심리의 기저에도 그런 발상이 내재해 있을 것이다. 교육이 바로 서기 위해 교사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 문제는, 1) 교사의 권위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하는 것과, 2) 교육이라는 게 꼭 교실에서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교사의 권위는 교육자로서 총체적 자질에서 온다. 학생에 대한 사랑과 더 나은 수업을 위한 전문성 신장이 교사 자질의 요체다. 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는 동료에게 선생님이란 호명을 거부하는 사람이 학생들을 어떻게 호명했을 것인지 뻔하다. “야이 자식아를 남발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학생들에게서 무슨 존경을 받겠는가? 교사의 권위는 존경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학생과 동료를 존중하는 교사가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권위를 세워갈 수 있는 것이다. 학생에 대한 아무런 애정이나 존중이 없이 꼰대적 권위주의만 앞세우는 선생님보다 친절하고 실력 있는 학원 선생님을 아이들이 더 좋아할 것은 당연하다. 교육은 비단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실 밖에서 하다못해 배움터지키미 할아버지에게서도 아이들이 인격적 감화를 받으면 교육이 발생한 것이다. 그 교육적 감화에 질투하는 선생은 초임 시절 내가 그러했듯이 소인배일 뿐이다.

 

사장님이란 천박한 호칭과 갑질의 일상화는 궤를 같이 한다. 이 비루한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의 초상은 봉건조선사회를 지나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기를 지나오면서 한국인의 의식에 내면화된 천박한 권위주의 의식의 산물이다. 이 추한 습속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학교 교사들이 문화혁신의 중요한 담지자가 돼야 한다. 우선 우리 자신부터 학교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행정실 직원이든 교무행정사든 급식소 조리원이든 배움터지키미든)선생님으로 부르자.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모든 교직원들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쓰게 하자. 호칭 속에는 호칭을 쓰는 사람의 인격뿐만 아니라 품위도 투영되어 있다. ‘아줌마/아저씨라고 부를 때와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호명하는 사람의 품격이 달라진다. 호칭은 습속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몸에 배여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교사 이외의 모든 어른들에게 습관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어른이 되어서 이 용어를 이웃에게 익숙하게 쓴다면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덜 추하고 보다 품위 있는 사회로 변모할 것이다.

 

201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