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말한다

가치판단은 구체적으로

리틀윙 2018. 7. 12. 13:42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본질은 구체적 조건,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다.

관련하여, 레닌은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남겼다.

 

추상적인 진리 따위는 없다.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abstract truth. Truth is always concrete.

 

내 지적 여정에서 만난 가장 유익한 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이 문장으로부터 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생각해 냈다.

 

뭐든 그 자체로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것은 없다. 모든 사물은 서로 대립되는 두 측면을 갖는다.

 

뭐든 그 자체로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것은 없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나 가치에 대한 판단은 항상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어제 쓴 글은 내가 근무하는 도량초 아이들이 대체로 순박하고 교사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인데, 아이들의 일기를 통해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어떤 분이, “일기검사는 학생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다라는 다소 불편한 댓글을 남기셨다. 이 돌출적인 반응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지금 작성하는 이 글을 올리려고 하다가 자제하고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수준의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그 뒤로 그 댓글에 댓글의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며 시간과 마음을 내서 이 글을 적게 된다.

 

그 댓글들에서 느끼는 불편 중 첫 번째는 논점일탈이다.

 

내가 차를 타고 대구에 가서 중학교 동창 친구를 만나고 왔다.” 라는 말을 하면, 어떤 친구인지,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오랜 만에 옛 친구를 만난 소회가 어떤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내가 모는 차종이 뭔가 라든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왜 자가용을 몰고 갔느냐, 요즘 환경문제가 얼마나 중요한데 진보를 자임하는 사람이 왜 그러느냐 하면 곤란하다.

 

최근 페이스북 글쓰기에 심각한 회의가 드는 게 이런 부분이다. 논점일탈 성격의 댓글에 일일이 댓글을 달다 보면 내가 망가진다. 시간과 감정 소모가 너무 큰 데 비해 소득은 없고, 오히려 관계만 나빠진다. 그러니, 그런 댓글들에는 대꾸 안 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내게 불편을 안기는 모든 댓글들에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페이스북은 훌륭한 학습공동체의 장이다. 나의 발전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태클에 불쾌감을 보이는 것은 옹졸할뿐더러 자기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내 말이 모두 옳을 수는 없고, 나의 오류를 누가 지적해줄 때 그로 인한 아픔은 감수해야 한다. No pain, no gain.

 

어제 댓글에서 두 번째 불편은, 위의 레닌의 명제와 관계있다.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어제 댓글에서 적었지만, 3에게 일기는 일기가 아니다. 사춘기 학생의 일기 검열이 인권침해라 하는 것은 일기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밀함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3과 초3은 다르다. 저학년 초등학생들은 일기를 통해 담임교사와 대화를 열어간다. 담탱이에게 일기장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라, 선생님에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저학년 초등교사의 일기 검사와 관련하여, 나쁜 것은 아이들의 성의가 무색하게 그냥 참 잘했어요도장 꽉 찍어주는 행태이다. 반면, 아이의 마음속에 들어가 의미 있는 타자로서 교사 입장에서 어떤 말을 적어주면 아이가 힘을 받을지 고민하는 자세는 참교육 그 자체다.

 

다부초에 근무하면서 처절하게 회의한 것도 이런 것이다.

진보를 자임하는 교사들이, 구체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원칙론(이게 교조주의)으로 아이의 성장을 오히려 방해하는 행태에 나는 치를 떨었다.

 

일제고사가 나쁘기 때문에 다른 학교에서 다 치는 시험을 안 치는 것은 좋다. 그러면 대안적인 평가도구를 개발해서 학생의 발달과정을 측정하고 기존 교육실천의 반성하고 더 나은 교육계획을 입안하는 것이 교육자로서의 온전한 상식이련만, 아예 아무 것도 안 한다면 그게 교육인가? 그 결과, 내가 볼 때 멀쩡한 아이가 6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모르고 졸업하는 아이도 봤다. 이게 진보교육인가? 개소리다!

 

3 3에게 일기검열이 나쁘기 때문에 나이를 떠나 모든 일기검사는 나쁘다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구체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저학년 초등학생의 일기장을 읽지도 않고 참 잘했어요도장만 꽉 찍어주는 것은 일기검열이다. 그러나 깨알 같은 글씨로 아이가 남긴 글에 따뜻한 한 문장을 적어주는 교사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교육실천은 없다. 서신 교환을 통해 교사-학생 간의 신뢰와 정이 쌓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교사가 남긴 그 한 줄 메시지 읽는 재미로 아이는 자꾸 글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테니 일기 검사는 훌륭한 정적 강화물이 되는 것이다.

 

물론, 검사로 인한 부작용은 있을 수 있다. 어제 댓글에서도 어느 분이 아이의 위선적인 글쓰기의 폐단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달리한다. 오히려, 일기 쓰기를 했기 때문에 아이의 이런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간혹 그런 아이가 있는데, 그것은 일기검열이 빚은 문제점이라기보다, 아이 자체에 내재된 성향이나 교사가 알지 못하는 가족관계의 문제점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일기검사를 계기로, 아이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중고딩 때 일기 검열 맡은 기억이 없는데, 요즘 중등학교에서 일기 검사를 하시나?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개인 문집을 만들어 에세이 쓰게 하고 검사해 주셨다. 나는 그 분을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사실, 12년 제도권 교육에서 내가 받은 유일무이한 글쓰기교육이었다. 그 분이 내게 글쓰기를 지도하신 것은 없고, 그냥 쓰게 하니 내가 쓴 것이다. 숙제 검사 차원에서 쓴 글이지만, 내가 실천한 유일한 글짓기 과업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도권 교육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무엇을 강제하는 것이 꼭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일기 검사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기 검사가 나쁘다고 일기도 뭐도 아무 것도 안 쓰게 하면 선생은 편하다. 그러나 학생은 나아지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교사가 자극을 주지 않는데 학생 스스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경우는 0.1퍼센트밖에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사춘기의 학생들과 초등학교 저학년은 다르다. 일기 검열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면, 초등1학년 꼬맹이들에게도 그림일기 숙제를 내지 말아야 하나?

 

진보병이다!

이 나라 진보가 전혀 진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레닌의 말을 안 들어서이다.

 

진리는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2018.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