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말한다

현재의 능력 외에 미래의 발전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리틀윙 2018. 2. 20. 09:34

영어 강사를 선발한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영어수업을 할 교사다. 가수의 역량은 노래로 가늠하듯, 교사의 역량은 수업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심사 평정표에 수업 시연(가상 수업상황에서 10분간 수업 진행하기) 점수가 제일 높게 배정되어 있다. 이를테면, 영어스펙(TOEIC, TOEFL 점수) 20, 수업시연 50, 인터뷰 20, 기타(ETC) 10점이라 치자.

 

응시자가 2명이다. A는 이쪽 세계의 경험이 많다. 다른 초등학교에서 영어강사를 오래 했기 때문에 초등영어수업에서 구사하는 어휘나 수업의 기승전결을 훤히 꿰고 있어 물 흐르듯이 수업 시연을 잘 했다. 하지만 토익/토플 점수는 낮고 영어 인터뷰에서 콩글리쉬가 심하고 발음도 안 좋다. 반면, 초등학교의 수업경험이 전혀 없는 B는 수업 진행은 아주 어색했지만, 인터뷰에선 순발력이나 문장 구성, 발음 등이 수준급이었다. 토익/토플 점수도 아주 높다.

 

여러분이, 고용주(혹은 임용권자)라면 누구를 선발하겠는가?

위의 평정표 상으로는 AB보다 높은 점수를 얻을 것이다. 수업진행 역량이 B보다 훨씬 우수했기 때문이다. 해서, 교사에게 수업이 중요하니 A를 선발한다면 과연 이게 현명한 심사일까?

 

공뭔 특유의 무사안일주의가 지배하는 학교에선 A를 선발할지 모른다. 심사관들은 정해진 심시기준에 따라 나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 자평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설학원이라면 100퍼센트 B를 뽑을 것이다. ? 지금 당장은 AB보다 수업을 더 잘 하지만, B는 앞으로 경험을 쌓고 또 약간의 트레이닝을 시키면 얼마 안 가서 A를 훨씬 능가하는 교사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 동계올림픽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썰매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윤성빈은 고3 졸업할 때까지 공부도 못하고 스포츠 능력도 별로여서 체육대학에 진학 전망이 어두운 학생이었다. 그러나 윤성빈의 엄청난 잠재력을 꿰뚫어 본 지도자의 안목으로 마침내 어제와 같은 기적을 일궜다. 만약 공뭐니즘에 입각하여, 객관적 능력 운운하며 기계적인 평가 잣대로 선수를 선발했다면 금메달은커녕 등위권 안에도 못 들었을 것이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그가 변화 발전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비고츠키는 인간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능력보다는 향후 발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 현재의 능력(=실제발달수준) 외에 잠재적 발달수준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이 두 수준의 간극을 근접발달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 ZPD)’으로 일컬었다.

 

현재의 발달수준이 10이나 되지만 트레이닝(=연수)을 시켜봤자 발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미래의 발달수준이 12A, 현재 수준은 5이지만 경험을 쌓고 조련시키면 향후 20으로 발전할 B 가운데 누구의 역량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할까? AZPD2, BZPD15이다. ZPD가 높은 사람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세계적인 기업 삼성을 창립한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사원선발을 위한 면접시험에서 역술인을 옆에 앉혀 놓고 관상을 물어가며 사람을 뽑았다고 한다. 토익 점수 따위의 객관적인 스펙에 기초한 평가보다 점쟁이의 주관적인 관상이 훨씬 회사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분의 평가관이 비고츠키의 과학적 관점에 훨씬 가까운지 모른다.

 

시험점수가 인간의 능력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별로 없다. 미래의 발전 가능성은 덮어 두고 오직 현재의 발달수준에 대해서만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미신이다. 불행하게도 이 미신에 따라 수능이라는 이름의 시험을 통해 학생들의 등급이 결정되고, SKY와 지잡대가 나뉜다.

 

..........

 

20년 전의 일이다.

군 교육청 주관 수학경시대회를 앞두고, 학교 대표로 출전할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교내수학경시대회를 열었다. 당시 3학년 담임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반에 수학 실력이 걸출한 아이가 있었다. 당연히 대표 선수로 뽑힐 줄 알았던 그 아이가 떨어졌다. 그 주된 이유가 다음과 같은 시험문제 때문이었다.

- 가로 4cm, 세로 5cm인 직사각형의 넓이를 구하시오.

 

너무 쉬운 문제 아닌가?’ 할 것이다. 아니다. 직사각형의 넓이 구하기는 4학년 교육과정에 나온다. 4학년에겐 너무 쉬운 문제이지만 3학년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수학 천재에 가까운 아이가 받아 든 문제들은 전부 저런 식이었고 아이는 거의 백지를 냈다고 한다. 문제는, 같은 3학년 경쟁자들은 저런 문제를 풀어냈다는 것이다. 더 나은 천재여서? 아니다. 선행학습의 힘이다. 내가 볼 때 수학교과 학습능력이 가장 뛰어난 아이가 참가자 10명 가운데 꼴찌를 했다. 이 평가가 이 학생의 학습능력을 제대로 평가한 것인가?

 

바보 같은 대답 없다, 오직 바보 같은 질문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공식을 암기하고 있는 아이에겐 너무 쉽고, 공식 모르는 아이에겐 너무 어려운 문제를 경시대회라는 이름으로 출제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거리일 뿐이다. 저런 시험에 길들여진 아이가 무슨 피타고라스나 파스칼로 성장하겠는가?

 

이 에피소드로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제 글 말미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발달수준 뿐만 아니라 미래의 발달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고츠키 식으로 말하면, 학생의 실제발달수준 뿐만 아니라 근접발달영역(ZPD)’까지 고려해야 한다. ([교사와 부모를 위한 비고츠키교육학] 46~47쪽에 이 내용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나는 위의 에피소드가 결코 시골학교의 무능한 교육자들에 의해 빚어진 촌극일 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학교에서 치는 모든 일제고사 따위는 물론, 최대한 정교하게 제작한 평가도구라는 수능시험또한 현재 발달수준만을 평가 대상으로 삼는 점에서 학생의 잠재 역량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학생 능력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ZPD를 적용해야만 하는 좋은 이유가 위의 사례이다.

가로 4cm, 세로 5cm인 직사각형의 넓이를 구하시오.” 따위는 경시대회 문제로 출제될 수준이 아니다. 그 보다는 공식을 이용하여 보다 복잡한 문제(이를테면 삼각형과 사각형 넓이 구하는 공식을 이용하여 사다리꼴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 해결 능력을 물어야 한다.

 

이 경우, 3학년 아이들은 삼각형/사각형 넓이 구하는 공식을 안 배웠기 때문에 학생들은 교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ZPD 개념이다. , 현재 실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 성인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 이럴 때, 똑같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어떤 아이는 원래 자기 실력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반면, 다른 아이는 약간만 발전했다면, 두 아이의 잠재적 지적 능력은 현격히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능이든 뭐든 현재의 학습능력만을 재단하는 평가에서는 이런 점을 측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평가하면 비고츠키 선생의 뜻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일까?

 

첫째, 정적 평가(static evaluation) 대신 역동적(dynamic)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역동적 평가에 대해서는 나의 책(교사가 교사에게) 71~79쪽을 참고하기 바란다.

 

둘째, 오픈북 테스트 따위의 평가가 바람직하다.

, 현재의 학생 머릿속에 단편적인 지식을 얼마나 많이 습득해 있는가(=실제발달수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교재나 인터넷의 정보를 활용하면서(, 매체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가는 역량(=ZPD)을 테스트 한다.

 

셋째, 수능시험은 문자 그대로 수학(修學) 능력을 묻는 것에 그쳐야 한다.

전국의 모든 학생의 ZPD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3 말년)의 발달수준이 70점인 학생과 80점인 학생 가운데, 향후 대학 교육을 받을 때 누가 더 큰 성장을 할지(ZPD)는 예측할 수 없다면 70점대나 90점대를 똑같이 보고 70점을 커트라인으로 삼아 그 안에 드는 모든 학생의 능력을 일단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수능에선 한 문제 틀리면 등급이 왔다 갔다 하고 서울대와 연고대, SKY와 지방대학이 갈라진다. 이건 너무 불합리하다.

 

정리하자.

회사에서 인재를 채용할 때나 학교에서 학생의 지적 능력을 평가할 때...... 현재의 발달수준 외에 향후 받게 될 학습이나 연수를 통해 얼마나 더 성장할 것인가 하는 ZPD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평가이다.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