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3인 우리 반 아이들은 가끔씩 공부가 재미있다고 한다. 실은 나도 공부가 재미있다. 책을 읽거나 나의 생각을 글로 쓰고 또 페이스북 벗들과 그것을 나누는 게 즐겁다. 그런데 고등학생인 나의 두 딸은 공부를 힘들어 한다. 배우고 익히는 인간활동(學習)은 즐거움이어야 하거늘, 유치원부터 고3을 지나 대학까지도 오직 시험을 위한 열공으로 점철되는 이 학력사회에서 공부는 아이들에게 고통만 안겨다 준다. 아이들을 이 무익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는 없을까?
공부가 지겹고 힘들지만 아이들은 밤잠 안 자고 열심히 한다. 남들보다 10분이라도 덜 자고 문제집의 문제를 하나라도 더 풀려고 애쓴다. 이런 재미없는 공부가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자신의 성장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아이들도 안다. 하지만, 쓴 약을 삼키듯 이를 악물고 열공에 매진하는 것은 이 치열한 생존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어떤 아이는 취준생이 넘쳐나고 실업률이 치솟는 현실을 감안하여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줄 겸 대학입시 대신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고 한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소년이 학교에서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이런 나라에 희망이 있을까?
아이들 고통도 고통이지만 공부 시키는 부모들도 등골이 빠진다. 부모가 뒷바라지 해주지 않아서 자신이 또래보다 못한 대학 들어갔다는 원망 안 듣고자 마트에서 알바 뛰어 자식 과외비를 벌어온다. 먹을 것 입을 것 줄이고 여행도 안 다니는 등 삶의 질을 포기하며 집집마다 천문학적인 사교육비를 틀어 붓는다. 개인은 물론 사회발전에도 결코 도움이 안 되는 이 망국적 경쟁교육 기관차의 폭주를 멈출 수는 없을까?
이 질곡의 입시교육시스템을 혁파하는 방법을 나는 안다. 문제의 해법은 문제가 생겨난 원인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논한 것을 정리해보자.
원래 재미있어야 할 공부가 재미없는 고역이 된 것은 현실 속의 공부가 시험을 위한 공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험은 왜 치는가? 선발을 위해서다. 선발은 왜 하는가? 생존경쟁의 구조가 치열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나라 교육의 모든 문제는 경제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육 문제는 해결 되지 않는다. 분배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인간을 인간답게 길러내는 교육, 인간다운 삶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경제 정의만 실현하면 학교가 희망의 교육공동체로 복원되어 모든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하고 아름다운 심성을 가꾸며 성장해 갈 것이고, 어른은 어른대로 덜 찌든 삶,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라고?
아니다. 소말리아에선 꿈이겠지만 한국에선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총 경제역량으로 충분히 실현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한지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수학실력이면 충분히 이해할 셈법을 살펴보자.
문재인 정부가 올해 최저임금을 7,530원으로 올려 나라가 시끄럽다. 향후 점진적으로 인상을 추진하여 2020년에 1만원까지 올린다고 하는데, 나는 차기정부가 ‘분배정의’의 정신을 계승하여 1만2천원까지 인상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내가 말한 교육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어 모든 아이들과 어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가능하다.
최저임금 1만2천원이면 월급으로 250만원이 된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의 주당 최대노동시수는 48시간이다.(주5일 근무에 1일 8시간이면 40시간인데, 유급휴일이 1일(8시간) 추가되어 총 48시간) 한 달로 환산하면 209시간이다. 따라서 최저임금에 209를 곱하면 월 최저임금이 나온다.
1) (올해 최저임금) 7,530 * 209 = 1,573,770원
2) (2020년) 1만원 * 209 = 209만원
3) (나의 바람) 1만2천원 * 209 = 250만8천원이다.
최저임금이 월 250이면 너무 과한 것일까? 경제대국 미국에서도 최저임금은 그만큼 안 될 텐데? 이에 대해 1)미국이 좋은 예가 될 수 없고 2)미국에서도 시애틀 주에선 최저임금이 12달러로 시행되고 있다. 이게 결코 과한 액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부의 분배 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한국사회도 1인당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월소득 250만원을 12(개월) 곱하면 3천만원이다. 원달러 환율이 1천원이 조금 넘지만, 현재 1인당국민소득 또한 3만불이 조금 못 되니 서로 상쇄하면 “250만원은 1인당국민소득에 거의 근접한 수치”라 하겠다. 유념할 것은 이 수치는 국가의 총소득을 근로 주체뿐만 아니라 전체 국민수로 나눈 것이기 때문에 한 가정의 소득과는 다르다. 2015년 통계로 우리나라 평균가구원수는 2.53명으로 조회된다. http://blog.daum.net/nohyd/534
즉, 1인당 평균 월소득인 250만원(3만달러를 12개월로 나눈 금액)에서 2.53명을 곱하면 632만5천원이 우리나라 가정의 평균 월소득액이 된다. 우리 주위에 월 소득액이 이만큼 되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대다수가 맞벌이인 우리 학교 아이들 가정에서 이 정도면 부자 축에 든다. 아마 그 비율은 5퍼센트도 안 될 것 같다.
우리 주위에 “평범한” 가정 가운데 “평균소득액”을 누리는 사람이 잘 없다는 것은, 부의 편중이 심하다는 방증이다. 2015년 통계상으로 “우리나라 상위 10%가 (금융자산과 부동산을 포함한) 전체 부의 66%를 보유하고, 하위 50%는 단 2%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0/28/0200000000AKR20151028218700002.HTML
‘하위 50%’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가? 50퍼센트면 절반이다. 그러니까 이 나라 백성의 절반이 2%를 놓고 서로 지지고 볶으며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매일 2천 개의 점빵이 문을 닫고 3천 개가 문을 연다. 폐업점보다 개업점이 1천 개나 더 많은 것은 매일 그만큼의 사람들이 직장을 잃거나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내가 살기 위해 네가 죽기를 바라는” 이 개돼지들(어느 교육부 고위관리의 표현으로)의 생존방정식이 그대로 학교에 전이된 것이 “입시위주의 치열한 경쟁교육”이다. 부모는 부모끼리 아이는 아이끼리 죽기 살기로 경쟁을 벌이는 이것이 헬조선의 현실이다. 여기서 무슨 인성교육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교육이 이루어지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막장 경쟁사회를 넘어 “같이 살아가는” 경제공동체가 회복되지 않으면 희망의 교육공동체도 불가능하다. 이게 과연 환원주의 혹은 경제결정론(economy determinism)으로 치부될 일인가?
며칠 전 인터넷 뉴스에서 요즘 베트남에 아파트 사러 오는 한국인들이 많다고 한다. 아파트마다 수영장이 딸려 있는 등 가격에 비해 품질이 좋아서 투자가치가 훌륭하다고 홍보를 하면서 3억 정도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3억이 동네 강아지 이름인가? 더욱 가관인 것은 부자들 사이에 수능 시험 친 자녀에게 선물로 이 아파트 사주는 게 유행이란다. 전체 부의 66%를 보유한 10퍼센트 부유층의 이야기일 것이다.
헬조선을 상징하는 ‘3포세대’라는 말이 있다.
1인당 평균 국민소득이 월 250만원인데, 50퍼센트에 속하는 취준생은 자기 혼자 몫인 250만원을 챙길 직업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그래서 결혼을 포기한다.(=1포)
경제능력이 안 돼도 사랑을 믿고 결혼하여 서로 이를 악물고 같이 맞벌이를 해도 “3만불*3”의 방정식을 충족시킬 자신이 없어 출산을 포기한다.(=2포)
평당 수천만 원 하는 아파트는 평생 벌어도 살 수 없다.(=3포)
이 모든 우울한 자화상은, 통계가 말해주듯이, 이 나라 국민 절반에겐 직접적으로 해당하고 나머지 절반 가운데도 대다수에게 간접적으로 해당할 것이다. 가방 속에 컵라면을 챙겨 넣고 지하철 도어 정비작업 하다 죽은 청년은 결코 남의 자식의 운명이 아니다. 근로 의욕이 충만한 이 건실한 청년들에게 최저임금 250만원을 보증해주자는 게 그리 과도하고 급진적인 망상일까?
10%가 전체 부의 66%를 보유하고, 50%가 2%를 놓고 서로 물어뜯도록 만든 현실에는 관대하면서 최저임금 몇 푼 인상한 것에 흥분하는 이 집단적 광기는 정신분열에 가깝다.
다시 최저임금 방정식으로 돌아가자.
현 정부가 목표로 한 최저임금 월209만원에서 40만원 정도만 보태면 250만원이 된다. 지금까지 논했듯이, 최소한의 선량한 분배정의만 실현해도 충분히 가능하다.
아, 좋다. 그게 무리라면 이건 어떤가?
이 나라 학생들에게 지출하는 사교육비 다 모으면 수 십 조원이 될 것이다. 그 돈으로 40만원 충당하고도 남는다. 최저임금 250이면 사교육비 지출할 필요 없는 세상이 온다. 말하자면, 40만원 지불하고 그 이상의 돈을 환급받는 격이다.
최저임금 250만원 세상이 오면, 죽기 살기로 입시공부에 매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학졸업장이라는 스펙 쌓지 않아도 알바 해도 250 버는데 뭐 하러 쓸데없이 토익점수 900점 따려고 아등바등하겠는가? 또한, 부모는 삶의 질을 포기하고 무리해서 사교육비 지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공부 안 하고 바보 되면 어쩌냐고? 아니다. 그 반대다. 지긋지긋한 입시위주의 공부에서 벗어나 흥미를 갖고 진리탐구에 파고들 것이다. 내 누누히 말하지만 요즘 아이들 예전 우리 때보다 공부 많이 하지만 아이들은 해가 갈수록 점점 바보가 되어 간다.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라도 현재의 막장 입시교육은 해체되어야 한다.
아이도 어른도 스트레스와 분노감정이 감소됨에 따라 학교에선 학교폭력이, 사회에선 묻지마 범죄 따위가 줄어들어 지금보다 훨씬 안전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질 것이다.
나눔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에선 비닐봉지값 20원 요구한다고 열 받아서 사람 찔러 죽이는 분노 범죄 따위가 그치지 않을 것이고, 상위 10퍼센트 소득자들도 그 피해 대상의 예외일 수 없다. 요컨대,
선량한 나눔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가정도 학교도 사회도, 더 가진 자도 덜 가진 자도 모두 모두 행복한 “사람 사는 세상”이 열릴 것이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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