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스타케미컬 공장 노동자 차광호가 2014년 5월부터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하며 45m 굴뚝 농성을 벌였다. 그는 이듬해 7월까지 장장 408일을 버틴 끝에 회사측으로부터 해고노동자 11명의 전원 복직을 약속 받고 내려왔다.
그뒤 이들은 같은 회사인 서울 목동에 있는 파인텍에서 일 해왔는데 회사 측이 노조-고용-단협 승계 약속을 파기함에 따라 졸지에 또 실업자가 되었다. 이에 이번에는 차광호의 후배 노동자인 홍기탁, 박준호가 높이 75m의 굴뚝에 올라가게 되었다.
무슨 등반대장 엄홍길처럼 '저기 굴뚝이 있어서' 오르는 게 아니다. 방 하나 넓이의 공간에서 몸놀림이라곤 앉았다 일어서는 게 전부여서 건강 유지가 쉽지 않다. 매서운 추위는 물론 강풍이 불어올 때 굴뚝의 흔들림에 따른 공포를 이겨내자면 초인적인 인내심과 용기가 바탕이 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이들은 머리에 뿔 달린 괴물도 아니고 강철 같은 의지와 적개심에 불타오르는 투사도 아니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살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이 전부다. 그래서 이들에게 ‘해고는 살인이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닌 이들의 현실을 정확히 말해주는 리얼리즘 그 자체다.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
인의협 의사 선생님들,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들이다. (아래 덧글 링크 참조)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802041049001&code=100100&med_id=khan
일 하는 사람들(노동계급)이 없으면 세상은 바로 멈추지만, 이들의 힘만으로 낡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선량한 소시민들이 힘을 보태야 한다. 값싼 동정심이어서는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체 게바라와 같은 치열한 실천일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같은 땅에 사는 이웃으로서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눠 가지려는 소박한 연대의식이라도 좋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분들의 투쟁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최소한 거부감은 갖지 말자. 붉은색 머리띠 두르고 투쟁을 외친다고 빨갱이는 아니다. 요즘은 교장들도 광장에서 머리띠 두르고 결사투쟁을 외친다. 교장들이 파괴분자가 아니듯 이 분들도 파괴분자가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보통사람들이다. 이 엄동설한에 스포츠 하러 그곳에 올라간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올라가 있다. 그들과 다른 삶을 누리고 있음이 죄는 아닐지언정 자랑일 수 없다. 우리가 따뜻한 밤을 지샐 때 그늘진 곳에서 추위에 떠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가 있는 곳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75m 높이의 굴뚝에 오른 노동자는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의 아버지일 수 있고, 우리 제자나 우리 자식의 미래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은 교육적이지 않다.
세상이 아프면 교사도 아파야 한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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