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

디지털 리터러시

리틀윙 2018. 2. 1. 08:18

경인교대 정현선 (Hyeon-Seon Jeong) 교수님 덕분에 디지털 리터러시혹은 미디어 리터러시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15세기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 현재까지 문명사회의 사람들은 종이 활자를 통해 자신의 지적 세계를 확장해 갔다.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지적 성장의 한계가 확연히 구별되니 이것이 리터러시(literacy)’ 개념이다.

 

문자해득상태를 뜻하는 리터러시는 비고츠키의 정신도구 psychological tool’의 개념과 관계있다. 나는 이 정신도구의 개념이 비고츠키의 창조적인 아이디어 가운데 가장 빛나는 통찰이 아닌가 생각한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인간의 노동이 기술적 도구(technical tools)에 의해 매개되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과정은 정신적 도구(psychological tools)에 의해 매개된다.

 

매개된다(mediated)라는 표현은 능동태로 이용(활용)한다의 뜻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땅을 팔 때 맨손으로 파는 것과 삽이나 포크레인이라는 기술적 도구를 이용하는 것은 효율성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동물에 비해 인간은 언어나 수화라는 정신도구를 이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을 훨씬 풍부하고 정교하게 나눌 수 있다.

 

리터러시는 단순히 글자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4학년을 가르칠 때 극장가에서 용의자라는 쓰릴러 영화가 유행했는데, 우리 반의 어떤 아이가 이 말을 용이 앉는 의자라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용의자라는 낱말을 읽고 쓸 수는 있어도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이 개념에 대한 리터러시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다. ‘literacy’에 관한 가장 유력한 권위자라 할 프레이리에 따르면, 리터러시는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낱말과 세계를 (비판적으로) 읽는 능력 Reading the Word and the World”을 뜻한다.

 

용의자라는 낱말을 읽고 쓸 수는 있지만 뜻을 이해 못하는 어린 아이와 반대로 읽고 쓸 수는 없어도 뉴스에서 그 낱말을 들었을 때 이해하는 노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용의자라는 정신도구(낱말)에 대한 활용 능력은 후자가 더 앞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을 생각할 때, 후자보다 전자의 지적 발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리터러시와 일리터러시(문맹)의 차이에 있다.

 

글은 모르되 일정한 식견은 갖춘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식견은 일천하되 글을 읽을 수 있는 손자 손녀가 향후 지적으로 더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뭔가?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 자문자답하건대, ‘나 홀로 학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낱말이라는 정신도구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입말과 글말이다. 문자이전 시대에도 사람들은 입말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개체발생적으로나(개인적 발전) 계통발생적으로도(인류의 발전) 지적 역량을 꾀해 갔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조상이 발견한 노하우를 구어로 전승하는 것과 문자로 기록하여 전달하는 것의 한계가 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입말을 통한 학습은 교수자의 현존(presence)을 전제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터러시를 낱말이라는 정신도구에 대한 활용능력으로 정의할 때, 구텐베르그의 시대와 4차산업혁명 시대에서 리터러시의 패러다임에 중대한 차이가 있다. 예전에는 정신도구의 보고(報告)가 책이나 신문 속에 종이활자로 담겨 있었지만, 지금은 TV를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도 전달이 되는 것이다. 특히 스마트폰을 비롯하여 인터넷 기반 첨단 매체의 발달로 종이활자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학습이 가능해졌다.

 

기술도구가 인간 노동을 매개하고 정신도구가 인간 정신과정을 매개한다 할 때 매개(mediation)와 미디어(media)는 어원이 같다. 세상과 인간, 사물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게 매개이고 연결시켜주는 것이 매개체(mediator) 혹은 매체(media)이다.

 

정 교수님의 책에도 이 비슷한 말이 나오지만, 학습 매체로 책이 전부인 시대는 가고 없다. 물론, 폭력성이라든가 폰 중독의 위험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안겨다 주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저자의 화두는 현명한 디지털 페어런팅이다.

 

현실적으로 일정한 연령에 도달한 아이에게 스마트 폰을 안 사주고 버티기가 어렵다. 다른 친구들은 다 갖고 있는데 운운 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가거나 할 때 아이를 이길 수 있는 부모는 없다. 물론, 이게 백해무익한 것이라는 생각이라면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망치느니 결사항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디지털 미디어에 관한 기존의 왜곡된 상식에 대한 해명과 더불어 디지털 세상(4차 산업혁명시대)을 맞아 디지털 미디어를 잘 활용하여 교육적 효과를 거두는 여러 가지 방안과 사례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뭐든 그 자체로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것은 없다. 옳고 그름은 항상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나의 경우, 스마트폰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매체를 통해 게임을 즐기거나 하는 건 아니다. 뉴스를 확인하고 페이스북 관리를 하고 또 구글에 들어가서 수시로 뭘 물어보고 답을 얻는다. 나의 사회적 삶이나 지적 성장에서 스마트폰은 필수불가결한 매체인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이 보여준다.

 

물론, 이 매체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그런 점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런 어른에게 스마트폰을 쓰지 못하게 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쓰지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게 하는 것이 우리 시대 부모와 교육자들이 고민할 지점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책으로 정현선 교수님이 번역한 [읽기 쓰기의 진화]는 미디어 리터러시 영역에서 권위있는 학자들의 글들을 모아 편집한 책인데, 논문들의 퀄리티가 상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역자의 번역 수준이 탁월하다. 대학교수의 번역서 치고 이렇게 훌륭한 작품은 보기 드물다. 난해하고 전문적인 글을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체로 옮겨 내는 정 교수님의 글짓기 역량은 국어교육과 교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영어실력은 평범한가 하면 안 그렇다. 번역은 결국 영어 낱말에 해당하는 한글 낱말을 조응시키는 작업인데, 문맥 상 영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를 머리 짜내 만들어내야 하는 난관에 부딪힐 때가 많다. 이 작업을 잘 하는 게 좋은 번역의 관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정 교수님의 번역 실력은 상당하다. 구체적으로, agency를 주도성으로 옮긴 것을 보며 감탄했다. appropriation자기화라 한 부분도 그러한데... 공교롭게도 비고츠키 책 번역하면서 나도 이 낱말을 자기화라 옮겼다.

 

정현선 교수님의 책을 소개한다는 것이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지루한 글이지만 해당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올렸습니다.

 

일독을 권하면서......

 

*

정 교수님의 책에 다가가기가 부담스러운 분은 교수님의 세바시 영상부터 보기실...

 

http://int.search.myway.com/search/video.jhtml?n=784868aa&p2=%5EY6%5Exdm007%5ETTAB02%5Ekr&pg=video&pn=1&ptb=3E2633B4-EFB1-4AB1-AE0F-333089A3470E&qs=&searchfor=세바시+정현선&si=EAIaIQobChMIlM_Lzq_T2AIVQS6WCh3KfQ7WEAEYASAAEgIekfD_BwE&ss=sub&st=tab&tpr=sbt&trs=wtt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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