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에르바하를 읽다가 흥미 있는 구절을 만나 글을 쓴다.
인간의 덕에 관해 포이에르바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참된 덕은 물질적인 기초가 충분히 다져져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덕 없이는 행복이 가능하지만, 행복 없이는 덕이 불가능하다.
문맥상 여기서 행복이란 물질적 풍요 속의 행복한 삶(복지 welfare)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말은 내 호주머니가 넉넉해야 남에게 덕을 베풀 수 있다는 상식적인 차원의 이야기이다.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덕을 바랄 수는 없다. ‘내 코가 석자’라고,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올바른 삶’, ‘인간다운 삶’에 대한 성찰과 실천이 가능한 법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예전에, “아파트 평수에 따라 사람의 퍼스낼리티가 다르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같은 아파트에서 예전에 평수가 작은 동에 살 때는 부부싸움 하는 소리나 술주정을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지금 이 곳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그런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그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선한 마음은 선한 물질적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예의 바르고 모범적이고 성격도 좋고 낙천적이고 정직하고 또...... 얼굴도 잘 생겼다.
지금 생각하니, 이 말은 선량한 독자들로부터 오해와 공분을 쌀 여지가 많았다는 반성이 든다. 실제로 그 글 밑에 많은 분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그 분들의 유감은 나의 이 표현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모독을 구성한다”는 의미로 좁혀진다.
많은 분들에게 그렇게 읽혔다면, 나의 잘못이 크다.
하지만, 지금 이 지면을 빌려 다시 오해를 밝혀 두건대, 나의 글이 가난한 사람들을 욕되게 하고자 하는 뜻은 눈꼽만큼도 없다. 어린 시절 내가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찌 그런 생각을 품겠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의 부덕을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의 그런 행동성향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그들에게 덕성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나눔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비닐봉투 값으로 20원을 요구한다고 해서 알바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이러한 분노범죄는 대부분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좌절과 연관되어 있다. 이 문제는 도덕교육 차원이 아닌 경제학적 차원에서 처방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선한 개인의 마음은 선한 사회구조적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2018.1.2.